김삼룡·이주하사건

김삼룡·이주하사건

[ 金三龍李舟河事件 ]

요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총선거 저지와 파괴 등 끊임없이 남한 정부 전복을 기도하던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1908∼1950)과 이주하(?∼1950)가 1950년 3월 체포되기까지의 사건.
언제 1950년 3월
어디서 남한
누가 김삼룡과 이주하
무엇을 체포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는 공산당이 불법단체로 규정되자 지하당을 조직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김삼룡은 1939년 박헌영(朴憲永)·이현상(李鉉相)·이관술(李觀述)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여 여기서 조직부장 겸 노동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일제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8·15광복 다음날 출감, 1945년 8월 21일 옛 경성콤그룹 지도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준비위원회가 해체되고 조선공산당이 박헌영을 총비서로 하여 재건되자 조직국간부를 맡았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민족주의민족전선 대의원을 지냈으며, 그해 11월 남로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년 9월 박헌영의 월북 이후 남로당을 책임지도하다가 1950년 3월 27일 서울 아현동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이주하는 일본지방공산청년동맹에서 활약하다가 1928년 원산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운동가로서 조선공산당 원산시 당책임자로 있다가 5년 동안 복역하였으며 주로 함남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함남 지구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월남하여 조선공산당 서기, 남로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다가 1950년 3월 남한정부에 체포되었다.

조직력에 뛰어나고 변장술에도 능한 남로당 핵심인물인 이들의 체포로 인하여 사실상 남한에 산재해 있던 공산당 조직은 붕괴되었다. 6·25전쟁 개시 직전에 북한은 김삼룡·이주하와 조만식(曺晩植)을 교환하자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전쟁 개시 직후 한강 백사장에서 사형당하였다.

참조항목

김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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