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콤그룹

경성콤그룹

요약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위하여 1939년 조직된 공산주의 비밀조직.
구분 비밀조직
설립일 1939년
설립목적 조선공산당 재건
주요활동/업무 반전투쟁, 반일민족통일전선전술, 무장봉기전술 실천
규모 4개 조직, 4개 노조책

1939년 4월경에 노동자·농민·학생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결성된 지하비밀조직으로서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광복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재유(李載裕) 계열의 이관술(李觀述)·김삼룡(金三龍)·정태식(鄭泰植) 등을 중심으로 1939년 4월에 지도부를 구성한 후, 1940년 2월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지도자로 하여 정식으로 결성하였으며, 이현상(李鉉相)도 조직에 가입하였다. 함경도의 장순명(張順明), 경상도의 권우성(權又成) 등이 지도하는 각 지방조직들과 조직적인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으며, 화요회계의 권오직(權五稷), 서울·상해계의 서중석(徐重錫) 등이 참여함으로써 종전의 분파적 성격을 해소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 활동가들과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새로이 성장한 활동가들이 결합된 조직이었고,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대표적인 권영태그룹·이재유그룹·이주하그룹 출신의 신진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1930년대의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새로운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반전투쟁, 반일민족통일전선전술,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 전술을 실천하였다. 조직부서로는 조직부·인민전선부·노조부·학생부·일본유학생부 등을 두었고, 섬유노조책·금속노조책·전기노조책·출판노조책을 별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40년 11월 말경 태창직물주식회사 공장반 조직에서 시작된 일제의 검거로 지도부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조직의 중견지도자인 이주상(李胄相)·김재병(金在丙)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도하였지만, 1941년 학생운동에서 시작된 일제의 검거로 다시 와해되었다.

이렇게 1941년 겨울까지 3차례에 걸친 대규모 검거사건으로 세가 위축되었지만, 여러 개의 소그룹을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혁명정세를 주시하였다. 또한 앞으로 재건될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결정적 시기에 도시폭동전술에 입각하여 일제를 전복한다는 방침으로 다양한 형태의 반전투쟁을 전개하며, 계급·계층·정파·성별·종교 등을 구별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여 인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아직도 이들의 실천활동의 성과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일제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어 모든 사상운동이 중단되었던 상황에서 조직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였으며, 일제하 국내운동가의 최후의 결산적 집결체이자, 1945년 9월 11일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