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

[ 朝鮮共産黨 ]

요약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공산주의운동 단체.
구분 공산주의 단체
설립일 1925년 04월 17일
설립목적 공산주의 방식의 항일독립투쟁
주요활동/업무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6·10만세운동 재현 시도, 민족혁명전선 조직에 관한 11개 지령 채택, 정우회 선언

1919년 3·1운동 이후, 1921년까지 급진적이고 점진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1922~1923년은 민족주의운동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분리되면서 분파가 발생한 시기였다. 또 1924~1925년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 정비를 시도하던 시기였다.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흐름

조선공산당 본문 이미지 1
물산장려운동서울청년회조선공산당화요회삼일운동신간회

이 시기에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국내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었고 1922년 2월 동우회선언(同友會宣言)을 전후로 사회주의 경향의 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무산자동맹회, 북풍회(北風會), 화요회, 조선노동당, 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 단체였다.

1923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高麗局]에서 밀명을 받고 잠입한 김재봉(金在鳳)과 김약수(金若水)·유진희(兪鎭熙) 등이 포함된 17명의 화요회를 모체로 하여 서울에서 코르뷰로 국내부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임명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박헌영(朴憲永)이 임명되었다.

화요회가 모체라서 '화요파의 당'이라고도 불렀다. 이때부터 국내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조선공산당을 1국1당 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하였다. 그러다 1925년 11월 김재봉과 박헌영이 조직 확대를 목적으로 청년회원을 모스크바에 파견하는 훈련을 진행하다 일제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무너졌다. 이것을 제1차 공산당사건이라 한다. 그러나 당시 체포되지 않고 숨어 있던 당 책임비서 김재봉이 당원 강달영(姜達永)과 함께 1926년 6월 서울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당 책임비서에 강달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선출되었다. 이들의 정치목표는 민족진영과 연합하여 국민적 당을 만들어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을 통해 3·1운동을 재현하려던 계획이 들통나 대부분의 당원이 체포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이것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이에 과거 화요회파와 대립 관계에 있던 도쿄[東京]의 좌경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 등이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때 체포되지 않았던 김철수(金鐵洙)와 손잡고 북풍회 계통의 ML파와 합세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속칭 ML파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을 통해 종래의 투쟁형태를 정치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관한 11개조 지령을 만들었다. 그러다 1928년 2월 당내의 내분에다 조직이 탄로나서 36명이 종로서(鐘路署)에 검거되었다.

한편, 춘경원당(春景園黨:서울 '춘경원'에서 결성되었다 하여 붙인 이름) 또는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조직이 1927년 12월 결성되었는데, 정통파 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28년 4월과 6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3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때 검거되지 않은 당 간부 안광천(安光泉)·한위건(韓偉健) 등이 서울 시내에 숨어 있다가 제4차 조선공산당을 조직,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 지부 및 고려공산청년회를 재건하였다. 차금봉(車今奉)이 당 책임비서, 고광수(高光洙)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학생과학연구회를 간판으로 내걸고 서울의 각 중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동맹휴학·시위행진 등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4차 조선공산당도 그해 7월 당 간부들이 거의 체포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뒤 대부분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실패하고 박헌영의 서울콤그룹만이 지하에 숨어 있다가 1945년 8·15광복을 맞아,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허헌(許憲)·김원봉·한빈(韓斌)·이주하(李周河)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당을 부활시킨 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결성되었다. 미군정의 공산당 간부 체포령으로 박헌영은 월북하고, 조선공산당은 남한지역의 남조선노동당과 김일성이 창립한 북한의 북조선노동당으로 양립하였으나 남조선노동당은 모두 숙청·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