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10월사건

대구10월사건

[ 大邱十月事件 ]

요약 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대규모 시위운동.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발생했으며 1946년 12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대구 10·1사건’, ‘대구 10월 항쟁’, ‘10월 항쟁’ 등으로도 불린다.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고,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대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일어났다고 그 의미를 왜곡하여 ‘대구폭동’이라고 불렀으나 2000년대 이후 희생자들의 유족과 지역 언론, 학계의 문제제기가 잇따르면서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0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대구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대구10월사건’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원인과 배경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경제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자의 철수, 남북 분단으로 인한 생산 체계의 단절, 해외귀환자나 월남민 등으로 인한 인구의 급증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자살과 범죄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성이 커졌으며,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일제 강점기보다도 더욱 궁핍한 상태에 놓였다.

특히 해방과 더불어 노동자·농민 내부에서는 기존의 식민지 경제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으며, 일부에서는 인민위원회나 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인이나 대일협력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분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 ‘패전국 일인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10월 5일 ‘미곡의 자유 시장에 관한 일반 고시 제1호’를 발표하여 식량대책위원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미곡의 자유 판매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가뜩이나 인구 증가로 수요가 늘어난 상태에서 일본으로의 밀수출이 늘고 투기꾼의 사재기가 벌어지면서 풍작임에도 쌀값이 폭등하는 문제가 나타나 심각한 식량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1945년 12월 19일 일반고시를 발표해 미곡의 소매가격을 통제했고, 1946년 1월 25일에는 식량난의 해결을 위해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는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수집 가격이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했고, 경찰력을 동원해 가택을 수색하고 처벌하는 식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농민들은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에 크게 반발하였다.

게다가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에 일했던 한국인 관리 대부분을 등용했으며, 일제에 경찰로 근무했던 사람도 대부분 그대로 임용되었다. 당시 농민들은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관들에 대해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쌀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공출해가는 것을 겪으면서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민심은 매우 흉흉해졌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해방 이후 30만 명의 귀환동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쌀 수요가 늘고 모리배들의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쌀값이 일제 강점기보다 무려 10배 이상 높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경상북도에서만 4천명이 사망하자 미군정은 전염을 막는다며 차량은 물론 사람도 시 경계를 넘지 못하게 교통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이 조치로 대구 시민들은 농작물과 생필품의 공급이 끊겨 쌀 부족으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9월부터 대구 시민들은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대구 지역의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벌인 9월 총파업에 맞추어 파업에 돌입했다.

경과

대구 10월 사건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의 군정에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격을 가한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10월 1일 오전에 파업을 벌이고 있던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에서 1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벌였고, 부녀자와 어린이 등을 중심으로 한 시민 1천여 명은 대구부청 앞에서 식량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경찰의 총격으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10월 2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대구경찰서를 에워싸고 돌을 던지며 경찰에 대한 분노를 나타냈고, 경찰들이 다시 군중에 총격을 가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빼앗아 무장한 뒤 시내 곳곳의 경찰관 주재소를 점거했다. 그리고 쌀 사재기를 저지른 부잣집이나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0월 2일의 시위 과정에서 적어도 18명의 시민이 경찰의 총격으로 죽었으며, 경찰관 4명도 시민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미군정은 2일 오후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 4대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여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체포에 나섰다. 미군의 무력 개입으로 대구의 시위는 10월 3일 무렵에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지만, 미군정에 항의하는 시위는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10월 2일 밤에 칠곡·고령·군위·영천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10월 3일에는 성주·김천·선산·의성·예천·영일·경주 등지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4일에는 영주·영덕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등 10월 6일 무렵에는 경상북도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12월 중순까지는 남한의 대부분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당시 시위대는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반발하여 식량 문제 해결과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였지만, 친일파 청산과 행정과 치안에 민중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 등의 요구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에 대한 반발과 경찰에 대한 반감 등을 배경으로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발생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동으로 조직되지 못해 군(郡) 단위 차원의 산발적인 봉기 이상의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시위가 확산되자 미군정은 시위 진압에 경찰력, 남조선국방경비대 등의 행정조직만이 아니라 민족청년단·서북청년회·백의사 등의 극우단체도 동원했다. 이들 극우단체들은 시위 주동자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에게 재산 피해를 입히거나 테러를 가하기도 해서 이 사건은 좌우의 이념갈등이 더욱 첨예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영향

대구10월사건 당시 경상북도에서만 전체 인구의 25% 정도인 77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남한 전체에서는 2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미군정은 이 사건으로 사망 20명, 중상 50명, 행방불명 3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지만,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에서만 13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5,000여 명이 폭동 혐의로 검거되었다고 알려져 실제 사상자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오랜 기간 이 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처럼 여겨지며 그 실체가 감추어져 왔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자의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정권의 사면 약속을 믿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대구10월사건 이후 미군정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토지개혁 정책을 서둘러 추진하였다. 1946년 2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의 소유농지를 신한공사로 귀속시켰던 미군정은 1947년 12월 농지개혁법안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우익의원들이 출석거부로 법안이 심의되지 못하자 농지개혁은 뒤로 미루고, 신한공사로 귀속시켰던 일본인 소유지의 매각에 착수했다.

그리고 미군정은 대구 10월사건 이후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이는 정치 영역에서 좌파 정치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7년 3월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도 철회하였고, 이는 반공을 앞세운 극우 단독정부 세력이 정치의 중심으로 더욱 확고히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역참조항목

미군정, 방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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