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미군정

[ 美軍政 ]

요약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삼팔선(한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하여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실시한 군사통치시기.

미소간의 한반도 분단점령이 결정된 후 중장 J.R.하지의 지휘하에 미육군 24군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 서울로 들어와 9일 삼팔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소장 A.V.아널드가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14일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고문으로 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18일에는 미군장교를 각 국장에 임명하고,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명칭으로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는 곧 미군정이 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배타적인 권위와 강제력을 독점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군정은 강제력과 권위를 배타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① 10월 10일 군정장관 아널드의 성명을 통하여 좌익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② 1946년 1월 15일 8 ·15광복 이후 생겨난 사설군사단체, 특히 조선국군준비대의 해산령을 발표, 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으며, ③ 2월 23일 정당등록법을 제정하고, ④ 3월 29일 행정기구를 확대하는 한편, 명령계통을 단일화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구체화하였다.

또한 ⑤ 4월 23일 《인민보》 《자유신문》 《현대일보》 등을 폐간 ·처분하고, ⑥ 5월 15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발표하였으며, ⑦ 18일 《해방일보》 정간명령에 이어 ⑧ 9월 (朴憲永) ·이주하(李舟河) ·(李康國)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고 ⑨ 1947년 8월 11∼14일 민족주의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인민공화당 중앙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중앙위 사무소를 폐쇄하고, 좌익계열 1,000여 명을 검거하였으며, ⑩ 1948년 5월 8일 5 ·10선거에 대비하여 미군에 특별경계령을 발포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관료기구에 한국인을 참여시키기 위한 조치로 ① 1945년 10월 5일 군정장관 고문관에 위원장 김성수(金性洙)를 비롯하여 한국인 11명을 임명하고, 12월 한국인 ·미국인 양 국장제를 실시하였으며, ② 1946년 2월 14일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구로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키고, ③ 5월 제1차 가 결렬된 이후에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④ 1947년 2월 10일 과도입법의원 안재홍(安在鴻)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하고, ⑤ 4월 5일 중앙정부를 13부 6처로 확대개편하였다. 또한 ⑥ 5월 17일에는 한미 양국인이 임명되던 인사배치를 끝내고 미국인은 고문관에, 한국인은 각 부처 의장에 임명하였으며, ⑦미군정청 한국인 기관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개칭하였다. ⑧ 12월 12일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장 金奎植)을 개원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결성되어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정치세력은 조선공산당-남로당으로 이어지는 좌익세력과, (呂運亨)이 이끌었던 인민당-근민당으로 이어지는 중도좌파세력, 김규식을 중심으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던 중도우파세력, 우익진영으로서 한민당세력, 김구(金九)가 중심이 되었던 한독당세력,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국민회로 이어지는 이승만(李承晩)을 중심으로 한 세력 등이다. 이들 각 세력은 자신의 계급적 기반과 이해관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따라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익진영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미소의 합의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판단 아래 소련 및 좌익진영과의 협상을 배격하고 미군정의 냉전정책을 추종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등 미군정과 마찰이 있기도 하였으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에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현실정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채 좌우의 대립과 민족의 분열을 조장 ·격화시킴으로써 민족정기를 흐려 놓기도 하였다.

중도진영은 미국이나 소련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합작을 통하여 민족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지만, 미군정에 의하여 정국안정과 좌익세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이용되었고, 결국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에 실패함으로써 몰락하였다.박헌영 중심의 좌익진영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미군정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고, 찬탁을 계기로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이후의 무장투쟁에서도 실패함으로써 남한에서 몰락하였다.

결국 3년간 실시된 미군정의 제반 정책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을 배제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을 독점적으로 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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