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산당

고려공산당

[ 高麗共産黨 ]

요약 1919년과 1920년 한국인이 조직한 2개의 공산주의 정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上海派]가 있다. 노령파(露領派) 또는 이르쿠츠크파는 1920년 1월 연해주(沿海州) 이르쿠츠크에서 당시 러시아 혁명군 제5군단장인 스메스키의 지도 아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김철훈(金哲勳)·문창범(文昌範)·오하묵(吳夏默)·김하석(金河錫)·한명서(韓明瑞) 등이 창당하였다.

처음에는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이라고 하였다가, 1920년 전로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을 통합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1921년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고쳤다.

이동휘(李東輝)가 상하이에서 조직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1918년 4월 이동휘가 하바롭스크에서 박(朴)마테비·김일(金一)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는데, 일본이 연해주로 공격해오자 이를 피해 상하이로 이주하여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1920년 이동휘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이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하여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여운형(呂運亨)·안병찬(安秉讚) 등을 가입시켰다.

그러나 상하이파는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정당이 아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정책상의 조직이었다. 당시 레닌과 관계를 맺고 그에게서 2차에 걸쳐 200만 루블의 자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동휘의 비서였던 김립(金立)이 정치자금을 유용하였다는 의혹사건이 일어나, 고려공산당은 분열되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 두 정당은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2대 원류(源流)를 이루었으며, 상하이파는 공산주의를 민족주의적 노선에 종속시키려 하였고, 노령파는 러시아에서 영주(永住)와 러시아에 대한 충성을 목적으로 한 볼셰비키적 정당이었다.

1923년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고려부(高麗部)를 설치하여 국내공산당이 조직될 때까지 이를 대신하다가, 이듬해 2월 고려부는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고, 위원(委員)으로 노령파의 한명서, 상하이파의 이동휘, 국내대표 정재달(鄭在達) 등이 임명되어 국내에 침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