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당자금사건

국제공산당자금사건

[ 國際共産黨資金事件 ]

요약 한인사회당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운동자금을 이르쿠츠크의 전러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이 탈취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하바롭스크에서 창설된 한인사회당은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하고, 박진순(朴鎭淳)·박애(朴愛)·이한영(李漢榮) 등 3명을 코민테른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코민테른 당국에 당원명부를 제출하고 영접을 받았으며 선전비로 400만 루블을 받았다(볼셰비키정권의 열악한 재정상황상 40만 루블 또는 그 이하라는 주장도 있다). 8월 15일 박진순 일행은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당시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8월 30일 상해로 가게 되었으므로, 한인사회당도 활동 거점을 상해로 옮기게 되었다.

한편, 앞서 1918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한 바이칼호 서쪽의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이르쿠츠크지부에서 활동한 김철훈·남만춘·오하묵·조훈·윤현 등 대부분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 2세들로 구성된 이르쿠츠크공산당 내의 한인은, 1919년 9월 5일 전러한인공산당을 조직하고, 당시 볼셰비키당에서 파견된 보리스 스미야스키의 지원하에 자신들만이 유일한 시베리아 한인들의 정통적인 당이라고 선언한다.

9월 10일 박진순 등 한인사회당 일행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전러한인공산당의 김철훈 등은 코민테른의 자금은 마땅히 자신들이 가져야 한다며 자금을 탈취하였다(1차 자금사건).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한 이동휘는 1919년 11월 자금 탈취 사실을 알고, 다시 박진순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자금탈취 횡포를 규탄, 고발하고 한인사회당을 끝까지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와, 상해 임시정부는 실질적으로 한인사회당의 정부이며 한인사회당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하여 심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서를 보냈다. 한인사회당의 이론가인 박진순은 이후 1920년 7월 19일∼8월 7일에 열린 코민테른 2차대회의 민족식민지문제소위원회에서 레닌·카메네프 등 각국 대표 20여 명과 더불어 한인사회당이 파견한 유일한 조선대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박진순이 코민테른대회에 의결권을 갖는 공식대표로 참가한 사실은, 당시 한인사회당이 이르쿠츠크의 전러한인공산당보다도 정식으로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조선사회주의(공산주의)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어서 이동휘는 1920년 1월 하순 자신의 충실한 막료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그는 1922년 겨울까지 모스크바에 체재하는 동안 레닌과 비밀협정을 성취시키고 볼셰비키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을 새롭게 지원받았다. 1920년 10월 그는 이중 60만 루블을 우선 제공받지만, 금화 60만 루블을 상하이까지 운반하기 힘들어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맡기고 40만 루블만 상해로 가져왔다.

상하이로 가는 도중 그는 치타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로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가는 김립과 만나 이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지 않고 한인사회당의 운동자금으로 사용할 것을 협의하였다. 12월 김립이 상해로 가지고 온 코민테른 자금은 많은 운동가의 독립자금으로 사용되었지만, 이 자금의 소재를 둘러싸고 상해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 사이에 알력이 발생한다.

임시정부 관계자는 이동휘에게 자금관계에 대한 경과보고를 요구하나, 이동휘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김립이 코민테른의 일부 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21년 1월 이동휘·김립·한형권 등은 한인사회당 대표회를 소집하여 자금분쟁과 관련한 최종적 태도를 확정하고 마침내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2차 자금사건).

결국 코민테른의 자금과 관련한 첫 번째 사건이 사회주의운동 세력 내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내부노선 투쟁이었다면, 2차 자금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노선과 민족주의노선간의 차이와 관련된 투쟁이었고, 결국 사회주의 세력인 한인사회당이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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