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

김삼룡

[ 金三龍 ]

요약 공산주의 운동가. 1939년 박헌영·이현상 등과 비밀 공산주의운동단체인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 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남한에서 계속 활동하다 6·25전쟁 직후 이주하와 함께 사형당했다.
출생-사망 1908 ~ 1950
활동분야 사회주의 혁명가
출생지 충북 충주

190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1939년 (朴憲永)·(李鉉相)·(李觀述) 등과 비밀 공산주의운동단체인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여 조직부장 겸 노동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제1차 의 노선을 계승하여 공장·지방·학생층에도 조직을 구성하였다.

1940년 일제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8·15해방 다음날 출감했다. 당시 광주에 피신해 있던 박헌영은 이순금(李順今:뒤에 김삼룡과 결혼함)을 전주로 보내 연락한 뒤 18일 전주에서 김삼룡을 만나 19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8월 21일 옛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모아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박헌영을 총비서로 하여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이영(李英)·정백(鄭伯)·최창익(崔昌益) 등의 옌안파를 흡수하였고 김삼룡은 이현상·김형선(金炯善) 등과 함께 핵심적인 조직국 간부를 맡았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민족주의민족전선 대의원을 지냈으며, 그해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년 9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박헌영이 월북하자 남조선노동당을 책임 지도하다가 1950년 3월 27일 서울 아현동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조직원들이 거의 체포된 상태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그의 체포는 사실상 남한에 산재해 있던 남로당의 붕괴를 의미했다. 6·25전쟁 개시 직전 북한은 김삼룡·이주하와 (曺晩植)을 교환하자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6·25전쟁 직후 이주하와 함께 한강 백사장에서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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