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강운동

자강운동

[ 自强運動 ]

요약 1905~1910년경 경제적·문화적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을 표방했던 운동.

기존의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용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의 용어이다. 현재 중·의 교과서나 일반인들을 위한 개설서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용어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단체명에서 유래된 용어도 아니고, 당시대인들이 사용했던 용어 또한 아니다. 더욱이 ‘애국적’이라는 용어는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를 내포하는 용어로서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계몽운동이란 운동방법을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식산흥업운동이나 정치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적당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근에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가 ‘자강운동’이다. 이 용어는 당시에 실력양성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던 ‘자강’이란 용어를 차용하여 붙인 것이다. 당시 신교육운동·식산흥업운동의 슬로건은 모두 이 자강, 즉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타의 문화운동들은 이를 선전하는 운동 또는 주체적인 실력양성을 위한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자강운동은 애국계몽운동보다 폭넓은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자강운동이라 해도 현실인식과 운동의 구체적 방법론을 달리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있었다.

첫째, 등 헌정연구회계, · 등 계, 정운복·최석하 등 계를 포괄하는 계열이다. 이들은 의 보호정치를 한국의 문명개화를 위한 선진 문명국의 지도라고 인식하였고, 만약 한국이 부강하게 되면 일본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면서 ‘선실력양성 후독립론(先實力養成 後獨立論)’을 내세웠다. 한국은 아직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지도하에 먼저 실력을 기른 후 완전한 독립을 되찾자는 주장이다. 결국 이들의 자강운동론은 일제에 타협적인 실력양성론이었다.

둘째, ·· 등 계열이다. 이들은 국권침탈의 원인을 의 침략성보다는 우리 자신의 실력 부족에서 찾고, 국권회복의 방법으로서 합법적 범위 내에서의 교육과 식산흥업, 조국정신과 국가사상의 고취 등을 제시하였다. 즉 이들도 실력을 길러 국력이 충실해지면 독립의 기회는 저절로 오게 될 것이라는 ‘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한편 이들은 동서고금을 참작절충하는 점진적인 문명개화노선을 추구하였는데, 그것은 이들이 유림을 문명개화의 잠재적인 힘이라고 본 시각, 유교를 근대적인 종교로 개혁하려 했던 것 등과 연관되는 것이다.

셋째, 의 ·신채호, 상동청년학원의 ·이동녕·이회영, 무관 출신의 이동휘 등 내의 급진파 계열이다. 이들은 일본에 의한 한국 보호국화를 병탄으로 인식하고 통감정치를 정복자의 정치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1908년경까지는 실력양성을 통해서만 국권회복이 가능하다는 ‘선실력양성 후독립’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1909년경에 그 입장을 철회하고 ‘선독립론’을 제기하였다. 실력양성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한국병합 방침이 확실해진 1910년에 이르러 국내의 실력양성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국외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것을 계획하였다.

넷째, ·최광옥· 및 등 서북지방의 신흥상공인들로서 주로 신민회 내의 온건파들이다. 이들도 실력을 기른 후에야 독립이 가능하다며 자강운동론을 제창하였다. 즉 ‘선실력양성 후독립’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안창호는 국권회복운동에서 지도자들의 단결과 국민들의 자강력 배양을 위해서는 수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민족전체가 근대적인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춰 민족갱생사업이 완수되면 독립운동이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믿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1910년대 , 1920년대 수양동우회의 설립으로 이어져 의 민족개조론의 유행을 낳았다.

한편 신민회 내의 급진파는 1910년대 이후 주로 국외에서 무장투쟁론과 국수보전론에 입각한 한국의 독특한 근대민족주의를 정립해 나갔다. 반면 천도교계와 청년학우회계, 그리고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신지식층들은 1910년 이후에도 선실력양성론의 입장을 고수하게 되고, 1920년대에 신문화운동 ·물산장려운동 ·민족성개조운동 등의 민족개량주의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한말 자강운동 내에는 19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정립되어 간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의 논리가 맹아 형태로 병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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