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개화론

문명개화론

요약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서양 문명에 대한 수용 논리로, 서양의 기술ㆍ기기만이 아니라 문화와 풍속까지 수용하여 낡은 폐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 문명개화론의 형성과 전개

서양 세력이 밀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낡은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서양의 문화와 사상, 종교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가의 자강(自强)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선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나 청(淸)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론),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 등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상과 가치관·문화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器機) 등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 했다면, 문명개화론은 ‘서구화=근대화’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서양의 문화와 풍속까지도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말은 일본의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서양사정외편(西洋事情外編)>과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概略)> 등의 저술에서 영어의 'civilization’을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말로 옮겨 사용하였다. 그는 기조(Francois Guizot)와 버클(Henry Thomas Buckle) 등의 문명사관(文明史觀)에서 영향을 받아 인류의 역사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보한다고 보았고, 야만(野蠻)·미개(未開)·반개화(半開化)·문명개화(文明開化) 등으로 그 발전 단계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영국 등의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문명개화국으로, 일본·중국 등을 반개화국(半開化國)으로 구분하고, 일본이 독립과 자존을 이루려면 중화사상(中華思想)이나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서양의 지식과 정치·법·기계·의식주의 풍속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는 마치 미국이 일본에 했던 것처럼, 일본이 조선·중국의 문명화를 지도해야 한다며 일본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는 이러한 문명개화론에 근거하여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운 급속한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특히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이 1871년부터 1873년까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고 돌아온 뒤에 문명개화는 시대를 상징하는 유행어처럼 되었다. 양장(洋裝)과 양식(洋食) 등 서양의 문화를 본뜬 풍습이 널리 유행했고, “서양식으로 짧게 자른 머리를 두드리면 '문명개화'라는 소리가 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떠돌기도 하였다. 메이지정부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표로 1879년부터 본격적으로 문명개화운동을 벌였다.

조선에서는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에 서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전통적인 성리학의 영향이 여전히 크게 나타났기 때문에 정부와 주요 지식인들의 개화에 대한 인식은 동도서기론을 중심으로 하였다. 동도서기론은 청(淸)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하여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는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 등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 급진적인 개혁을 꾀했던 변법(變法) 개화론자들을 중심으로 문명개화론이 확산되었다. 여기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김옥균과 박영효는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방문했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유길준(兪吉濬) 등은 1883년 보빙사(報聘使)의 일행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서양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뒤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김윤식(金允植)은 홍영식이 미국을 다녀온 뒤에 “유교를 비판하는 데 기탄이 없어 이상한 무리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영식은 서양을 문명의 보편적 기준으로 삼아 전통 문화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본의 문명개화론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유길준은 1881년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했으며, 1883년부터 1885년까지는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문명개화론을 퍼뜨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가 미개·반개화·문명개화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온갖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른 것”이라며, 개화를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더 높은 문명화의 단계에 이르는 진보(進步)의 개념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반개화국인 조선은 점진적인 개량으로만 문명개화국이 될 수 있다며, 김옥균·박영효 등과는 달리 점진적인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개화를 실상개화(實狀開化)와 허명개화(虛名開化)로 구분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開化黨)에 대해 “외국의 모습을 칭찬하면서 자기 나라를 우습게 여기는 … 허명개화만을 추구했던 개화의 죄인”이라고 비판했다.

2. 문명개화론의 특징과 한계

문명개화론은 중국의 유교 문화만을 문명(文明)으로 인식하고 그 밖의 것들을 야만(野蠻)으로 여겨 배척하던 전통적인 존화양이(尊華攘夷)의 화이론(華夷論)을 극복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화이론과는 반대로 미국과 유럽의 문화를 문명으로, 조선·일본·중국의 전통 문화를 비문명(非文明)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명개화론은 중국 중심의 정치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정치운동이 발달하는 데 기여하였다. 문명개화론에 기초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던 개화당과 독립협회 등은 청과의 봉건적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 독립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들은 친청(親淸) 사대외교의 폐지와 내각(內閣)의 설치와 같은 정치체제의 개혁, 인민평등권의 보장과 같은 사회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명개화론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화가 곧 사회의 발전이라는 식의 비주체적인 인식과 태도를 낳기도 하였다. 문명개화론은 인류 사회가 미개·반개화·문명개화의 단계로 일원론적으로 발전한다고 보며, 문명개화의 단계에 있는 미국과 유럽의 문화가 문명화의 보편적 기준이 된다. 그래서 서구의 문화만이 문명이고 다른 문화는 야만이라는 형태로 화이론과 마찬가지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나타난다. 결국 전통의 문화의 풍속은 열등하게 여기고 서구의 문화와 풍속만을 맹목적적으로 추종하는 잘못된 근대화의 태도가 나타내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문명개화론은 미개 사회를 문명화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과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로 쓰이기도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조선의 문명화에 대한 지도라고 합리화했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문명화된 일본이 비문명인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문명개화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본질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는데, 조선의 문명개화론자들이 청과의 봉건적 사대관계 청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상대적으로 일본의 침략적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는 철저하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요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 등이 조선 문화의 일본화와 민족 개조 등을 내세우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도 문명개화론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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