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론

동도서기론

[ 東道西器論 ]

요약 1876년 개항을 전후로 하여 형성된 서양 문명에 대한 수용 논리로,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만을 수용하여 국가의 자강(自强)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동도서기론의 논리와 전개과정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란 전통적인 사상과 가치관, 문화와 풍습 등의 동도(東道)는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과 기기(器機) 등의 서기(西器)는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다. 자기의 도(道)를 기반으로 다른 나라의 기기는 받아들이자는 뜻에서 오도이기론(吾道異器論)이라고도 한다. 전통 문화의 우월성을 전제로 하여 서양 문물의 선택적인 수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청(淸)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서 나타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에서 나타난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동도서기론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도기론(道器論)과 화이론(華夷論)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주역(周易)>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는 형이상(形以上)의 것은 도(道), 형이하(形以下)의 것은 기(器)라고 서술되어 있다. 곧 도(道)는 형상(形象)을 초월한 원리나 규범을 말하고, 기(器)는 형상을 갖춘 사물을 가리킨다. 성리학에서는 도(道)와 기(器)의 관계에 대한 도기론(道器論)을 발전시켰는데, 주희(朱熹)는 답황도부(答黃道夫)라는 글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리(理)와 기(氣)가 있는데, 리(理)는 형이상의 도(道)로 사물을 낳는 근본이며 기(氣)는 형이하의 기(器)로 사물을 낳는 도구이다”라며 도(道)와 기(器)를 각각 리(理)와 기(氣)와 연결시켜 해석하였다. 동도서기론은 이러한 성리학의 도기론에 근거하여 군함과 대포 등 서양의 이기(利器)는 받아들여 사용해야 하지만, 문화와 풍습 등의 리(理)는 배척하여 성리학적 가치관과 질서는 유지해야 한다는 기용리척(器用理斥)의 논리에 따라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정도(正道)로 보고, 서양의 가치관과 문화를 인륜에 어긋나는 사도(邪道)로 간주하는 화이론(華夷論)의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은 1880년대 초반에 나타난 조선 정부의 개화 정책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 1876년 일본과 을 체결한 뒤 조선에서는 서양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그 해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기수(金綺秀)는 <일동기유(日東記遊)>에서 서양에서 전래된 기술 문명을 목격한 내용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달했다. 조선 정부는 개명 관료들을 중심으로 군비(軍備)와 기술의 자강(自强)을 통한 근대적 개혁을 모색하였고,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홍집(金弘集)이 그 결과를 보고한 것을 계기로 하여 그 해 12월 (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근대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881년에는 김윤식(金允植)을 (領選使)로 임명하여 청나라로 유학생을 보내 신식 화약과 탄약 등의 제조법을 배워오게 했다. 그리고 박정양(朴定陽) 등 12명을 조사(朝士)로 임명하여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보내 근대 문물과 시설을 자세히 조사해 오도록 하였다.

전직 관료와 일부 유생들은 상소로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며 동도서기의 논리를 체계화하였다. 1881년 7월 전 장령(掌令) 곽기락(郭基洛)은 “서양이라고 하더라도 기계 기술이나 농서가 진실로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행할 것이오, 그 사람으로 해서 그들의 좋은 법까지 물리칠 필요는 없습니다”라며 서양 문물을 가려서 수용하자는 채서(採西)의 주장이 담긴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882년 12월 유생 윤선학(尹善學)은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붕우(朋友)·장유(長幼)의 윤리는 하늘이 만들어 성품에 부여한 것으로 온 천지에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이치로 위에 있어서 도(道)가 됩니다.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배, 수레, 병기, 농기는 밖에 나타나 기(器)가 됩니다. 신이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기(器)이지 도(道)는 아닙니다”라는 상소로 동도서기론을 체계화하였다. 한편, 고종은 직후인 1882년 9월 16일 전국에 세운 (斥和碑)를 모두 뽑아버리라는 명을 내리면서 개화 정책을 지지하는 윤음(綸音)을 공포하였다. 김윤식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윤음에서 고종은 “기계를 제조하는 데 조금이라도 서양의 방법을 따르면 사도(邪道)에 물든 것으로 보는데, 이 또한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의 교(敎)는 사악하므로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미색(美色)처럼 멀리해야 하지만, 그들의 기(器)는 이로워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니 농기구·의약·병기·배·수레와 같은 것을 제조하는 데 무엇을 꺼려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들의 교(敎)는 배척하고, 기(器)는 본받는 것을 병행하여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여 동도서기론을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동도서기론은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의 전래 과정에서 전통적인 지배체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의 수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추진하려는 필요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도기론이라는 전통적인 성리학 이론에 근거해 서양 문물의 수용을 정당화함으로써 정부의 초기 근대화 정책을 뒷받침했다.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

한편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의 한 유형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화사상을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문화와 풍속까지 수용하는 문명개화(文明開化)를 주장한 변법(變法) 개화론과 청(淸)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기술과 기기·제도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동도서기를 주장한 시무(時務) 개화론으로 나눈다. 곧 개화사상은 개화의 범위와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로 나뉘며, 동도서기론은 그 가운데 점진적이고 온건한 경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淸)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시하면서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한 김윤식·김홍집 등의 온건 개화파를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이 서구 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성격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별개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도(道)는 그대로 유지하고 기(器)만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과 문화만이 정도(正道)라는 화이론(華夷論)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에 의해 발전된 개화사상은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는 개화(開化)를 통해 인류 문명이 더 높은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러한 화이론에서 벗어나 있다. 오히려 유길준 등은 인류 문명이 미개(未開)·반개화(半開化)·문명개화(文明開化)의 세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아, 동도서기론과는 반대로 조선이 서양에 견주어 문명화가 덜 이루어진 상태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동도서기론은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유지·강화를 꾀했지만, 김옥균·박영효 등은 전제왕권의 제한을 통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의 정치개혁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김윤식은 동도서기론에 근거해 김옥균·박영효 등에 대해 “갑신정변의 역적들은 서양을 높이고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을 폄하하며, 인륜 도덕을 야만이라 하여 그 도(道)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칭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은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므로 완전히 별개의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도서기론을 초기 개화사상의 단계에서 나타난 논리로 보는 학자도 있다. 곧 초기 개화사상은 동도서기론에 기초해 형성되었지만, 1880년대에 들어서 문명개화를 목표로 하는 변법적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동도서기론은 중국의 중체서용론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초기 단계에 나타난 문화적 대응 양태로 해석된다. 초기 개화사상은 화포와 화륜선 등 서양의 새로운 무기와 기기 등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데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서양 문물의 선별적 수용을 강조한 동도서기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구 열강과의 접촉이 확대되어 서양 문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높아지면서 인민평등과 자유민권 등의 새로운 정치의식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서양 문물의 전면적인 수용을 강조한 문명개화의 논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곧 개화사상이 동도서기론에서 문명개화론으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치며 확대되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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