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김윤식

[ 金允植 ]

요약 한말의 개화사상가. 17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자력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자강론을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흥사단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출생-사망 1835 ~ 1922
본관 청풍(淸風)
순경(洵卿)
운양(雲養)
국적 대한제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경기도 광주
주요저서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1835년(헌종 1)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시대 왕실의 외척으로 세도가 였으나 영조이후 쇠퇴하였다. 부친은 김익태이고 집안은 가난하여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8세때 부모가 모두 사망하자 호조참판을 지낸 숙부 김익정에게 의탁하였고 비로소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서울로 유학하여 유신환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배웠으며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박규수의 문하로 들어갔다. 1865년 초시에 합격해 건릉참봉(建陵參奉:정조 능지기)이 되었고 이를 사직하고 1872년 출사해 사헌부감찰, 경모궁령을 지냈다.

40세인 1874년(고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1879년 영선사(領選使)로 청(淸)나라 톈진[天津]에 파견되었다.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시찰한 김윤식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특히 신무기를 개발하여 군사력을 키워야만 외적을 막을 수 있다는 자강론(自强論)을 전개하였으며 무익한 비용을 줄여 군사력 증강에 써야한다고 주장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군란이 평정된 뒤에 신설된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과 통상교섭사무아문(通商交涉事務衙門)의 협판(協辦)이 되고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겸하여 강화에 진무영(鎭撫營)을 설치, 신식 군대 800여 명을 양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원군으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를 제거하였고, 병조판서가 되고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자 1885년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처리하였다.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 민영익(閔泳翊)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다가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면천(沔川)에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시작된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그의 천거로 외무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이 죽고 친러파 내각이 들어서자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를 미리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을 받았다. 이일로 1897년 12월 20일 고종의 명으로 제주도에 종신토록 유배되었다. 천주교 신자 토벌사건으로 1901년 다시 전라도 지도(智島)로 이배되었다가 유배생활 10년만인 1907년 송병준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중추원의장으로 발탁되고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병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 작위는 주군(순종)의 명으로 받았다고 해명했다.

1916년 경학원의 대재학이 되었으며 흥사단(興士團) ·대동학회(大東學會) ·기호학회(畿湖學會)를 조직하고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나철(羅喆)을 원조, 그 교도가 되어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이용직(李容稙)과 함께 한국 독립의 청원서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 제출하여 작위를 삭탈당하고 이일로 2개월간 투옥되었다가 고령과 중병을 앓고 있는 이유로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1922년 1월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문집에 《운양집(雲養集)》, 저서에 《천진담초(天津談草)》 《음청사(陰晴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