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대종교

[ Daejonggyo , 大倧敎 ]

요약 단군(檀君)을 교조로 하여 민족 고유의 하느님을 신앙하는 종교.
단군전

단군전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일본에 건너갔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09년에 동지 오기호(吳基鎬) 등 10명과 함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교도수는 2만여 명으로 늘었고,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本司)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 1916년 나철이 죽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憲)이 취임하였는데,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고,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19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1923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領) ·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施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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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에 기여한 대종교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