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갑신정변

[ 甲申政變 ]

요약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여 일으킨 정변.
갑신정변 이후 국내외 상황

갑신정변 이후 국내외 상황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歐美)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 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서재필(徐載弼) 등의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 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 등의 온건개화파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종전대로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민씨 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忠義契)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76년 이래 조선의 해외 시찰 정책, 즉 일본 수신사(修信使)와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 청나라로 영선사(領選使) 파견 등에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와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일본 방문으로 박영효와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와의 관계를 수립하여 조선의 문명개화를 서두르고자 하였다.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등에 유학하게 함으로써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 등을 배우게 하였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외무아문(外務衙門) 아래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 정권이 부분적인 개화 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심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 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은 민씨 정권과 급진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 침략을 획책하였고,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하여 정권 유지를 도모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가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 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
  • > > >

관련동영상

3일 천하의 어원이 된 갑신정변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