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

개화당

[ 開化黨 ]

요약 19세기 중엽 이후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정책을 추구한 급진개화파.

개화당의 형성과정은 1870년을 앞뒤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과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이 형성한 개화사상, 그리고 중국에서 들여온 서구사회를 소개한 신서(新書) 등을 공부하면서 형성되었다.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와 역관 출신 오경석, 의관 출신 유홍기 등 중인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이미 체득한 실학적 학풍에다 사신으로 경험한 중국견문을 더하여 개화사상의 기초를 닦은 박규수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지닌 열강에게 대항하려면 중국처럼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기기(대포·화륜선 등)를 채용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양반 자제 가운데 젊고 유능한 청년 김옥균·박영효·박영교·홍영식(洪英植)·서광범·김윤식(金允植) 등을 모아서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담고 있던 연암문집을 비롯하여, 그가 중국을 통해 터득한 견문과 서구사회의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가르쳤다.

그들은 자신이 체득한 사상을 정치에 반영시켜 부국강병을 달성하기로 작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일대혁신을 위해 젊고 진취적인 양반 자제들 가운데서 개화세력을 육성하기로 계획하였다. 때마침 1869년 박규수가 한성판윤 겸 형조판서로 임명되자, 그 해 말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은 사상적 동지로서 뜻을 모으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다수의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공부하게 하여 정치집단으로서의 개화파가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북촌(당시 고관 양반들의 집단 거주지)의 양반 자제로서 약관 20세에 문과에 급제한 김옥균,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를 비롯한 김윤식·홍영식·서광범·서재필(徐載弼:서광범의 조카)·박영교(박영효의 형)·어윤중·유길준(兪吉濬)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자본주의 제도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이들은 ‘서구사회나 일본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관심을 쏟았고, 76년 개항을 계기로 일본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계기인 메이지[明治]유신에 주목하였다. 그들과 소수의 양반 출신 청년 관리 및 유홍기를 비롯한 일부 중인 출신의 선진적 지식인은, 개항 이후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하면서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정치세력, 즉 개화파(개화당)를 형성하였다.

개화당의 활동

개항 이후 외국과의 통상교섭이 본격화되자 조선정부는 세계정세를 아는 신지식을 가진 개화관료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정부 조직에 중견관료로 진출하여 부국강병의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개화정책에 힘썼다. 개화파는 양반 유생층 가운데 선진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포섭함은 물론 궁녀 ·환관 등 왕의 측근에도 일정한 지지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개화정치세력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개화파는 1879년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한 것을 비롯하여 80~84년 서재필 등 청년들을 일본에 보내 근대적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광주(廣州)의 수어청(守禦廳)을 근거로 군사력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형성되어간 개화파는 정부의 기구개편과 일본의 조사시찰단, 청의 영선사(領選使) 파견에도 적극 개입하였고, 개화사상을 널리 펼치기 위한 문화활동도 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사학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여 83년 말경에는 그 수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임오군란 뒤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와 김옥균은 신문발행을 위한 자금을 차관하고 인쇄 기술자를 데려와서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83). 홍영식은 근대적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되자(1884), 그 총판(總瓣)을 맡았다. 이 시기 재정적으로 궁핍 일로에 있던 민씨정권이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따라 당오전(當五錢) 발행을 서둘렀으나,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악화를 발행하면 재정적 곤란을 타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가고를 가져와 국민생활에 해독을 끼칠 것이라 주장하면서 당오전 발행 대신 외국차관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국왕에게 300만 원 국채모집의 위임장을 얻은 김옥균은 울릉도와 제주도 어채권을 담보로 외채를 모집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근대화 노력은 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위기에 빠진 민씨정권을 다시 세우고, 3,000여 명의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켜 조선을 속방화(屬邦化)하려고 하였다.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강화되는 가운데 민씨정권은 지금까지의 개화정책을 후퇴시키고 친청보수화정책(親淸保守化政策)을 강화하였다. 때문에 이들에게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리하여 청나라와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을 크게 후퇴시켜 개화운동을 저지하는 한편 개화파를 탄압하였다. 이때부터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의식은 날로 높아져 갔고, 이를 타개하려는 방법을 두고 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리되었다.

개화당 본문 이미지 1
양무운동메이지유신영선사조사 시찰단온건개화파급진개화파(개화당)갑신정변청일본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일파와의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청과는 종래대로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청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론(洋務論)적 개혁입장과 비슷하였다. 이에 반해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는 달리,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문명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 ·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인 민씨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화파가 청에 대한 외교문제와 개화의 속도와 폭을 둘러싸고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진 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개화파를 개화당이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청의 속방화정책에 반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청에 의존하던 민씨정권을 사대수구당이라 부르던 것에 대응하여 개화독립당이라고도 하였다.

위기에 몰린 개화당은 1884년 5월 청과 프랑스 사이의 안남[安南:Annam]문제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가운데 1,500여 명이 철수하고, 8월에 청 ·불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정변과 이후의 개혁작업에 필요한 군대와 차관문제에 호의를 보이자, 마침내 84년 음력 10월 17일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변은 곧 이은 청군의 무력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 9명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로써 개화당은 일단 몰락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의 냉대 속에서 10년을 전전하다 청나라로 건너가 자신의 뜻을 펴보려 하였지만, 94년 3월 상하이 동화양행(東和洋行)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개화당은 민씨정권이 몰락하고 친일갑오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95년 말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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