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김홍집

[ 金弘集 ]

요약 조선의 문신, 마지막 영의정. 을미사변 후 일본의 압력에 의한 을미개혁을 실시하다가, 의병들의 규탄을 받고 붕괴되었으며, 그는 살해되었다.
김홍집선생 묘

김홍집선생 묘

출생-사망 1842 ~ 1896
본관 경주(慶州)
경능(敬能)
도원(道園) ·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 충헌(忠獻)
본명 초명 굉집(宏集)
국적 조선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이정학재일록》

본관 경주(慶州) 김씨이며 개성유수를 지낸 김영작(金永爵)과 창녕 성씨의 아들(3남)로 1842년 7월에 출생하였다. 초명은 굉집(宏集)이었으나 홍집(弘集)으로 개명하였다. 천주교도이자 개화사상에 식견을 지닌 부친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박규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7년(고종 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훈련도감, 사간원을 거쳐 흥양현감(興陽縣監:현재 전남 고흥)이 되었다. 1880년 6월 25일 예조참의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할 때 청나라 공사관 참찬관인 황준헌(黃遵憲)을 만났고 그가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와서 이를 소개하고, 조선은 청국과 친(親)하고 일본과 결(決)하며 미국과 연(緣)하여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개화파의 지지를 받아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유학자 중심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뒤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부사로서 활약하고 이어 제물포조약 체결에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후 일본 세력이 표면화되고 강력해지자, 그 힘으로 제1차 김홍집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세력을 잡자 강력한 친일파 인사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여 새로운 국가체계를 세우고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의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이후 프랑스·러시아·독일이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건 삼국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된 제3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섰다. 이에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제4차 김홍집내각을 세웠다. 내각은 일본의 압력을 받아 단발령(斷髮令)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규탄을 받았으며, 1896년 친러파 내각의 탄생과 함께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 그때 많은 대신들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김홍집도 광화문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성립시켰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순종 때 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