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기

유홍기

[ 劉鴻基 ]

요약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당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생-사망 1831 ~ ?
본관 한양
대치(大致, 大癡)ㆍ여여(如如)
별칭 백의정승(白衣政丞)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한양(漢陽), 자(字)는 성규(聖逵)이다. 호(號)는 대치(大致), 여여(如如)인데, 크게 어리석다는 뜻의 대치(大癡)로 쓰기도 한다. 유홍기라는 이름보다는 유대치(劉大致)라는 별호로 더 많이 불린다.

1831년 서울에서 역관(譯官) 유익소(劉益召)와 김해 김씨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중인(中人) 신분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의학을 익혀 의업(醫業)에 종사했다. 같은 역관 집안인 최영원(崔榮遠)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서울 청계천(淸溪川) 장통교(長通橋) 북쪽의 장찻골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몸집이 크고 건장했으며, 홍안백발(紅顔白髮)의 외모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품성이 매우 청백(淸白)했으며 언변이 뛰어나고 서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실학양명학(陽明學)을 깊게 공부했으며, 특히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 봉원사(奉元寺)의 승려 이동인(李東仁) 등 불교계의 인물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에게 불교 연구를 권하여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오경석(吳慶錫)은 역관으로 1853년부터 1875년까지 13차례나 중국을 왕래하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직접 체험했으며,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가져왔다. 유홍기는 오경석과 함께 이 책들을 함께 읽으며 시무(時務)에 대해 토론하여 초기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1870년대에 들어서 박규수(朴珪壽), 오경석과 함께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 등 노론 계열 명문 사족의 자제들을 모아 국제 정세와 서양의 새로운 사상 등을 가르쳐 개화파를 양성하였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77년에 박규수가 죽고, 1879년에는 오경석마저 죽자 유홍기는 홀로 개화파의 인물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의 지도 아래 김옥균·박영효 등은 정치적 결사로서 개화당(開化黨)을 형성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개명 관료들을 중심으로 군비(軍備)와 기술의 자강(自强)을 통한 근대적 개혁을 모색하였고,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근대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김옥균·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윤치호(尹致昊) 등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의 인물들이 정부의 근대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개화사상의 선각자로서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는 1882년 정부가 행정기구 개편을 위해 설치한 감생청(減省廳)의 부사용(副司勇)으로 관직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는 사용(司勇)으로 승진되기도 하였으나, 왕실 척족(戚族)의 반대로 감생청이 6개월 만에 폐지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윤치호(尹致昊) 등 개화파 인사들이 고종에게 그의 등용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조선에 대한 청(淸)의 내정 간섭이 나타나면서, 군주의 개명화(開明化)를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의 활동은 한계에 부닥쳤다. 김옥균·박영효 등의 개화당 인물들은 청의 내정 간섭이 근대화의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하고, 정치개혁을 통한 급진적인 근대화를 꾀하였다. 그들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14개 조의 정강(政綱)을 발표하며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유홍기는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과 관련된 인물들의 복권이 이루어진 뒤에도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갑신정변 당시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홍기 연보
출생 1831~ 사망 ?

1831

서울에서 출생.

1869

박규수가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서울에 와 오경석, 유홍기와 교류하게 됨.

1870

박규수, 오경석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등 노론 계열 명문 사족의 자제들을 모아 공부하며 개화파를 양성.

1876

강화도조약 체결.

1877

박규수 사망.

1879

오경석 사망.

1880

통리기무아문별기군이 설치되는 등 정부에서 개화정책이 추진됨.
김옥균, 박영효 등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 인물들이 정부 개화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면서 명성이 높아짐.

1882

정부가 행정기구 개편을 위해 설치한 감생청에서 부사용을 지냄.

1884

김옥균, 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가 3일 만에 실패로 끝남.

1894

갑오개혁이 실시되어 갑신정변과 관련된 인물들의 복권이 이루어졌으나 유홍기의 행적은 파악되지 않고 갑신정변 당시 피살된 것으로 추정.

역참조항목

탁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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