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순보

한성순보

[ Hanseong sunbo (Hanseong Ten-Daily) , 漢城旬報 ]

요약 1883년(고종 20)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2012년 10월 17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정종목 국가등록유산
지정일 2012년 10월 17일
소장 서울대학교
관리단체 서울대학교도서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서울대학교
시대 1883년 10월 31일~1884년 10월 9일
종류/분류 등록유산 / 기타 / 동산
크기 1식(30호)

조선 말기 개항 이후 정부는 근대화를 위해 주변 선진국의 문물을 배워오는 외교활동을 펼쳤다.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에서 신문제작의 문물을 보고 한국에서도 국민계몽의 차원에서 신문 발간을 서둘러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귀국길에 신문 발행에 도움이 될 일본인 인쇄공 및 기자를 데리고 왔다.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 시장)직에 부임한 그는 왕(고종)을 자주 알현하고 신문의 역할과 발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간행 허가를 간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한성부에서 관장하여 신문을 발행토록 허가하였다(1883. 2). 박영효, 유길준 등 중심 책임자의 직책이 바뀌어 발간이 지연되다가, 온건개화론자인 김만식(金晩植)이 신문 발간업무를 추진하였고, 고종은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하였다.(1883. 8. 17). 그리하여 박문국 초대 총재에 외아문 독판인 민영목(閔泳穆)을, 부총재에 김만식을 임명하여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그해 9월 20일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근대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신문 발간의 실무 책임자는 김인식(金寅植)이었으며, 그 밖에 기사를 모으고 작성하는 기자와 유사한 신분으로는 장박(張博), 오용묵(吳容默), 김기준(金基駿), 강위(姜瑋), 주우남(朱雨南), 현영운(玄映雲), 정만조(鄭萬朝), 오세창(吳世昌) 등이 일하였다.

이 신문은 10일에 한 번씩 발간하는 순보(旬報)였다. 신문의 성격은 순보서(旬報序)에 밝힌 바와 같이, '외국 신문을 많이 번역하여 게재하고 국내 사건도 실으며,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해서 취사선택하도록 하였고, 신문으로서 바름(正)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외국 기사로는 중국의 <중외신보> 와 일본의 <동경일일신보> 등 여러 신문의 기사를 선택적으로 번역하여 게재하였는데, 당시의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벌어지는 전쟁이나 군사장비, 국방정책, 개화문물, 민주주의, 의회제도 등을 소개하였다. 국내 기사로는 개인적인 일, 관(官)에서 하는 일, 한성시에서 하는 일 등을 구분하여 게재하였다. 각 관아에 배포하여 관리들이 읽도록 하였으며, 관청과 개인 모두 구독할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박문국에, 지방에서는 경저(京邸)에 연락하여 구독할 수 있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치적 대격변을 겪으면서, 정변의 실패와 함께 박문국의 인쇄 시설이 모두 불에 타 신문 발간이 중단되었다. 중단 1년 여가 지난 후에 <한성주보>(漢城週報)로 다시 발간되어(1886. 1. 25) 신문의 맥을 잇게 되었으며 발행주기면에서 순보와 다르다.

한성순보는 2012년 10월 17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한성순보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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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항목

광인사, 박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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