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건개화파

온건개화파

[ 穩健開化派 ]

요약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등장해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 개화파.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외국과의 통상교섭이 본격화되면서 신지식인들로 구성된 개화 관료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통틀어 개화당(開化黨) 또는 개화파라고 한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의식이 날로 높아지면서 이를 타개하려는 방법을 두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리되었다.

온건개화파의 중심 인물은 김홍집(金弘集)·어윤중(魚允中)·김윤식(金允植)·이조연(李祖淵) 등이다. 이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파와 타협하면서 기존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개혁을 수행하자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 청(淸)나라와 계속 사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청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의 개혁과 비슷하다. 반대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永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뿐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까지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 종식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는데, 이 때문에 청나라에 의존하던 민씨정권과 온건개화파를 사대수구당으로, 자파를 개화독립당으로 부르면서 차별성을 부여하였다. 그뒤 개화파는 급진개화파로 기울었으나,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몰락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점진적 개혁 역시 급진개혁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서 입지를 넓히지 못하고, 백성들의 호응도 얻지 못해 결국 실패하였다.

온건개화파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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