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

일진회

[ 一進會 ]

요약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倂呑政策)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장선 친일단체(1904∼1910).
구분 친일단체
설립일 1904년
설립목적 친일적 민의의 필요
주요활동/업무 대한제국 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 제출
소재지 서울

1904년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 왕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07년 5월 2일에는 정부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를 제출하여 국채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구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8일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일진회원들을 토살(討殺)시키고 일진회 지부 및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파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濱]에서 암살된 이후부터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가열되어 국권피탈안을 순종에게 몇 번씩 상주하기도 했다. 이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끝내고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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