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운동

소년운동

[ 少年運動 ]

요약 일제강점기에 열악한 어린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방정환 등이 진행한 사회 운동.

3·1운동의 좌절 이후 국민 계몽과 사회 개조, 신문화 건설의 목표 아래 추진된 실력양성운동이 민족운동의 한 축으로 대두하였다. 전(全)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동안 소외된 사회 계층이었던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소년에 대하여 민족운동의 주체로서 주목하기 시작하였는데, 소년운동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실력양성운동의 하나로 일어난 민족운동이었다.

본격적인 소년운동은 1921년 4월 '천도교 청년회' 내에 소년부를 두면서 시작되었다. 소년부는 도쿄 유학생 방정환(方定煥)과 김기전(金起田)을 지도자로 맞이하였으며, 이듬해 4월 5일에는 ‘천도교 소년회’로 개편되었다. 천도교 소년회는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정하고 어린이를 위한 기념행사를 치렀으며, 1923년 3월 20일부터는 기관지 <어린이>를 발간하여 소년운동의 필요성과 소년 애호 사상을 전파하였다. <어린이>는 1934년 123호를 끝으로 종간될 때까지 소년운동의 전개에 크게 기여하였다.

천도교가 소년운동을 주도하는 가운데 국내외 각지에서 소년운동 단체가 등장하였다. 1922년 서울에서 '조선소년단'이 창립되었고, 1923년 3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가 창립되었다. 소년운동이 확대되자 운동을 더 조직화하고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방정환, 조철호(趙喆鎬) 등은 1923년 4월 17일 '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였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행사를 개최하였다.

소년운동은 점차 확산되어 1924년 5월에는 전국에 123개 소년 단체가 결성되었으며, 1925년 5월에는 220개에 달하였다. 1920년대 중반 소년운동은 절정을 맞았지만, 여러 단체들이 난립하면서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소년운동에 대한 소양을 전혀 갖추지 못한 지도자들이 적지 않았고, 소년 단체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는 부모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일제는 아동들이 계몽하는 것이 일본에 충성하는 신민을 양성하려는 자신들의 교육 방침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소년운동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더하여 소년운동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분열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기존의 소년운동협회에 만족하지 못했던 인사들이 1925년 5월 새롭게 '오월회(五月會)'를 결성하여 대립하였다. 두 단체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926년과 1927년에는 어린이날 행사를 별도로 개최하는 데 이르렀다. 어린이를 위한 운동을 표방하면서 어른들의 주도권 다툼으로 비화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다시금 통합된 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하였고, 1927년 10월 100여 개 이상의 단체가 가입한 '조선소년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통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합회 내의 주도권을 사회주의 진영이 장악하고, 조직체를 '조선소년총동맹(조선소년총연맹)'으로 전환하면서 천도교 소년회와 방정환 등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다시 소년운동 내부에서의 좌우 대립이 심화되었고, 지도부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소년운동도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1930년대 소년운동을 부흥시키려는 노력 속에 1931년 3월 '조선 어린이날 중앙 연합 준비회'가 결성되어 매년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해 나갔으나, 1937년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시 체제를 가동하고 일체의 청년·소년운동을 금지하면서 해방을 맞을 때까지 소년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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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나라의 보배다! 일제강점기 소년운동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