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앞둔 소나무의 회고

이별 앞둔 소나무의 회고

주제 농림/수산(축산/임업), 환경, 사회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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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여린 어린 나무들아, 너희들 보기엔 그저 낯설겠지만 이 바늘처럼 뾰족하게 솟은 것이 내 잎이란다. 사계절 내내 이런 모양이라 사철 푸르다는 게 우리의 자랑이었지. 울퉁불퉁 거칠게 겹을 두른 줄기는 기개와 강인함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봄이면 꽃놀이다, 가을이면 단풍이다 들과 산으로 왕왕 몰려다녔지만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여전히 푸르른 우리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단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도 소나무만은 깍듯이 모셔, 인간처럼 벼슬 받고 재산을 거느린 나무도 있었단다.

시련은 언제부터였나. 너도 곧 알겠지만 생명이란 고요한 호수 같을 수 없어. 산다는 것 자체가 소소한 다툼과 크고 작은 전투가 쉼 없이 벌어지는 거대한 전장이지. 그러니 우리 소나무가 겪은 시련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란다. 한 나무, 한 나무는 절대 알 수 없는, 먼 과거부터 이어져 왔지. 인화성이 강한 탓에 산불 피해도 많았고, 솔나방, 솔잎혹파리, 소나무깍지벌레···. 그리고 지금의 재선충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병충해도 많았단다.

재선충이 한반도에 찾아온 건, 1988년이었어. 부산 금정산이 처음이었지. 옆 나라 일본의 소나무가 재선충의 피해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던 때가 1900년대 초인데 그 뒤로도 한참을 우린 재선충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어. 하지만 일단 발견되고 나니 속수무책으로 나무들이 병들어 갔지. 공중에서 살충제를 뿌리고 고사(枯死)한 나무를 잘라 없애고 온 나라가 소나무병을 고친다고 나섰지만 해마다 피해지역은 늘어만 갔단다. 2014년에는 서울 지역에서도 발견돼 위기감이 한층 커졌어. 소나무가 곧 멸종한다는 둥 매년 수십억의 예산을 들여 방제 작업을 할 계획이라는 둥 방송에서 연일 우리 얘기가 나왔지.

그런 얘기들은 바람을 타고 깊은 산속까지 들려왔어. 재선충도 바람을 타고 번져 나갔지. 재선충은 1mm 내외의 실 같이 생긴 선충이야.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해. 그래서 솔수염하늘소나 북방수염하늘소 몸에 기생하며 살지. 솔수염하늘소는 소나무 껍질을 갉아 먹는데, 그때 생기는 상처를 이용해 나무속으로 파고든단다. 그리곤 물과 양분이 이동할 통로를 막아 나무를 말라 죽게 만들지.

재선충이 파고든 나무는 솔잎이 아래로 처지며 시들기 시작해서 3주가량 지나면 잎이 가을날 단풍처럼 갈색으로 변해버린단다. 치료약이 없어 한번 감염되면 그대로 죽는다고 봐야지. 병들어 죽은 나무를 베어 쌓아놓으면 재선충과 숙주인 하늘소는 금방 나무에 구멍을 뚫고 도망가 다른 나무로 옮겨갔어. 바람이 많이 부는 때에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퍼져나갔단다. 재선충 한 쌍은 20일이면 20만 마리로 늘어나니, 그 퍼지는 속도가 짐작이 가지?

재선충이 들어간 지역에서 소나무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어. 일본에서, 대만에서, 중국, 포르투갈까지. 소나무는 살 방법을 찾지 못했어. 병에 걸리지 않는 나무까지 모두 베어서 확산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말이야. 일본 땅에서 온 전문가는 한국의 상황도 낙관적으로 보지 않더군.

우리 소나무들은 지구에서 꽤 오래 살았단다. 중생대 트라이아스 말기라고 하니까 대략 1억 7천만 년 전이지. 대부분이 빙하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백악기부터는 대략 지금 같은 모습으로 살아 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긴 세월이었어. 사람들은 소나무가 없어진다니 당황하고 아쉬워하며 어쩔 줄을 모르지만 우리 속을 헤아리진 못하겠지.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산 지 족히 3천 년. 한반도에 뿌리내린 소나무들은 일가족이나 다름이 없단다.

우리는 다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자라는 재주가 없었으니까, 잎이 큰 활엽수들이 부쩍 자라 해를 가리면 살 수 없으니 자연스레 다른 나무들과 같이 자라는 걸 피하게 됐어. 솔잎을 떨어뜨려 발밑에 두텁게 쌓아 다른 나무의 씨앗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혹 다른 나무 싹이 트면 송진을 분비해 죽도록 했지. 구불구불 구부러진 송림을 사람들은 참 좋아했어. 솔잎을 따다 송편을 찌고, 송화 가루로 약식을 만들고, 송이버섯을 기르고, 송진을 가져다 약으로 썼지.

이 땅은 우리가 살기에 좋고, 사람들은 우리 덕을 봤으니 서로 좋았는데, 이제 시절이 달라지려나봐. 다른 나무들은 단풍 들고 잎을 떨어뜨리며 요란하게 동면을 준비하는데, 우리도 매년 나름의 방식으로 겨울을 준비해. 겨울이 되면 지방함량을 높여 겨우내 소모할 영양분을 저장하고 조직의 구멍에는 두꺼운 세포벽과 왁스층을 만들어 열과 수분이 가능하도록 조절하는 일이야. 지구 온난화 탓인지, 온도가 점점 높아져 우리들은 겨울을 준비하는 법을 자꾸 잊어버리게 됐어. 전에 볼 수 없던 해충이 늘어가고, 소나무들이 그에 대처할 방법을 통 찾지 못하는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진 않았을 거야.

사람들은 재선충에 맞서 소나무들을 살리겠다고 병든 나무를 베고, 훈증을 하고 톱밥으로 만들고, 공중에서 살충제를 뿌려댔지만 우리들은 한편으론 걱정을 했어. ‘저 많은 살충제는 해충만이 아니라 나무도, 그리고 강도 땅도 사람도 병들게 할 텐데···’라고. 재선충이 아니라도 급격한 기후변화 때문에 50~60년 뒤엔 소나무는 강원도와 지리산 같은 일부 지역에서만 살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이미 나온 터여서, 우리들은 오히려 담담했단다.

오래 정든 터전을 떠나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들지. 그래, 그걸 바라보는 쪽도 힘들 거야. 특히 이 땅 사람들은 지구 상 어디보다 우리와 특별한 관계였으니. 이 모든 일이 인간의 허술함이나 오만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면 손 놓고 있을 수 없겠지. 그런데 생명이란, 우리의 터전인 지구란 인간의 잔 계산으로 좌지우지할 만큼 약하고 작지 않아. 우리 소나무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새 삶을 개척하게 될 거야. 혹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을 이어갈 수도 있겠지. 어린 나무야, 우린 흙으로, 비로, 바람으로도 네 곁에 있을 거란다.

  • 이소영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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