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융합인재, 수학자 최석정

조선의 융합인재, 수학자 최석정

주제 수학(통계), 인문
칼럼 분류 인물기사
칼럼 작성일 201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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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농공상(士農工商). 조선시대는 문(文)을 기반으로 한 통치사회였다. 과학과 기술은 상대적으로 대접받지 못했고 그만큼 과학기술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딘 것이 사실이었다. 장영실이나 홍대용과 같은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는 널리 알려진 과학기술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조선에도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라는 위대한 수학자가 있었다. 최석정은 명문가 집안에서 1646년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17세에 초시 장원을 하고 1671년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며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만 8번을 지냈으니 말 그대로 엘리트 정치인, 관료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최석정의 대단함은 이렇게 전문적인 정치가이자 관료의 삶을 살면서 수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는 수학이나 과학기술보다는 유학이나 주자학을 중시하던 당시 사회 풍조에서 더욱 돋보이는 일이다.

■ 학문 발전에도 힘 써
최석정이 활약하던 때는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토가 황폐화된 시기로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재빠른 복구를 위해서라도 많은 실용적 지식이 필요했다.

수학에 관심이 많은 최석정은 수학을 증진시키는 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박율의 수학책인 산학원본(算學原本)이 발행될 때 서문을 쓰는 등 적극적으로 독려한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의 융합인재, 수학자 최석정 본문 이미지 1

당시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던 중국을 통해 국내로 선진 문물을 도입한 공로도 크다. 1686년 중국 출장을 통해 서양의 앞선 학문을 접한 최석정은 <천학초함(天學初函)>, <동문산지(同文算指)> 등의 서적을 조선에 소개해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이바지했다.

■ 오일러보다 67년 앞선 마방진
최석정은 서학(西學)의 영향을 많이 받고 공부했으나, 기본적으로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수학을 정리하고자 했다. 이는 주역철학과 성리학, 양명학에 두루두루 이해가 깊으면서도 수학에 관심 많은 최석정의 다양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수리철학은 수학과 동양철학을 결합한 독특한 형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방진

마방진 n2개의 수를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의 수를 더하면 모두 같은 값이 나오도록 n × n 행렬에 배열한 것

그의 수리철학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대표 저작인 <구수략(九數略)>이다. 이 책은 동양 고전역학을 바탕으로 당시 수학이론을 정리한 조선시대 대표적 수학서다. 오늘날의 4칙 연산을 각각 태양, 태음, 소양, 소음으로 구분하는 등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구수략이 유명한 이유는 세계 최초로 9차 직교라틴방진(Orthogonal Latin Square)이 게재됐기 때문이다. 마방진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9차 직교라틴방진은 가로 세로 9칸씩 81개의 칸에 숫자가 1에서 81까지 하나씩 들어가는 방진이다. 가로, 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합이 같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가 최초로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세대학교 송홍엽 교수의 노력으로 최석정이 67년 앞섰음이 인정됐다.

■ 동양 철학과 수학을 접목하다
당시 수학의 가장 큰 쓰임새 중 하나가 천문과 역법이다. 수학을 좋아했던 최석정은 자연스럽게 천문역법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조선은 청에서 들여온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조선 상황에 맞게 해석하는 등 수학을 활용할 일이 많았다.

최석정은 <천학초함(天學初函)>과 같은 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시헌력과 관련된 천문학을 공부했으며, 1687년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는 시계의 수리를 건의하기도 했다. 또한 기상관측 관서인 서운관의 최고 책임자인 서운관영사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의 천문학연구를 전반적으로 관장했다.

최석정은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13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제정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선정됐다. 그는 정치가이자 관료이자 학자였으며, 학문적으로는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양의 수학을 융합한 ‘융합적 인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오늘 밤에는 마방진 퀴즈라도 풀어보며 조선에도 세계에 내놓을 만한 멋진 수학자가 있었음을 생각해 보자.

  • 김청한 -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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