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 풀무치가 거무스름한 황충으로?!

푸른색 풀무치가 거무스름한 황충으로?!

주제 농림/수산(축산/임업), 환경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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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별다른 심술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따갑던 여름 햇살이 비켜나간 자리에는 여름내 햇살을 듬뿍 머금고 자란 황금 들판이 펼쳐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전남 해남군 일대 간척지에서는 움직이는 시커먼 물체들이 황금 들녘의 빛을 잃게 만들 만큼 대규모로 출현해 농민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만들었다.

이들은 차라리 재앙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대규모로 출몰해 가을걷이를 앞둔 논밭의 생명력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이러한 악몽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풀무치의 약충이었다.

풀무치(Migratory Locust)는 메뚜기목 메뚜기과 풀무치속에 속하는 곤충으로, 우리나라 곳곳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다. 풀무치는 1년에 한 번 번식을 하며, 짝짓기 후 암컷은 긴 삽 모양의 산란관을 땅 속 깊숙이 밀어 넣어 여러 개의 알주머니를 낳은 뒤 생을 마감한다. 변온동물인 곤충에게 추운 겨울은 그야말로 혹독한 계절이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알의 상태로 겨울을 넘기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리고 이듬해 초여름에 깨어난 풀무치는 7월에서 10월 사이에 성충으로 자랐다가 다시 번식을 하고 생을 마감하는 일생을 반복한다.

메뚜기목에 속하는 다른 동료들처럼 알에서 깨어난 풀무치 유충은 몇 번의 탈피 이후 번데기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충이 되는 불완전 변태를 한다. 이렇게 불완전 변태를 하는 곤충들의 유충을 약충(nymph)이라고 한다. 즉, 이번에 해남 지역에 나타난 괴생명체의 정체는 아직 성충이 되기 전 단계인 풀무치의 약충 떼였던 것이다. 하지만 불완전 변태를 하는 곤충들의 유충은 크기만 약간 작고 날개가 온전하지 않을 뿐 겉모습은 성충과 거의 유사하다. 게다가 풀무치 자체가 다 자라면 몸길이가 5~7cm에 달할 정도로 제법 큰 곤충이기 때문에 약충이라고 해서 무시할 것이 못 된다.

원래 풀무치는 ‘풀’+‘묻히다’, 즉 풀 속에 묻혀 있는 듯 보인다는 이름처럼 초록색을 띈다. 풀빛을 닮은 풀무치 몸의 색은 천적인 새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보호색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알들의 부화율이 높아져서 약충과 성충들의 개체 밀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몸의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색이 변하고 군집을 이룬 풀무치는 황충(蝗蟲)이라고 해 이름도 달리 불리는데, 이때의 황충은 단순한 곤충이 아니라 악몽에 가까운 재앙을 의미하는 이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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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치는 단독 생활을 할 때는 몸빛이 녹색(왼쪽)이지만, 군집을 이루게 되면 몸의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식욕이 증가한다(오른쪽).

보통 황충 무리는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천억 마리에 이르는 개체수를 자랑한다. 이들 각각은 하루에 자신의 몸무게의 2배에 달하는 양을 먹어 치운다. 그래서 황충떼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듯이 황폐화되기 십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충의 출현은 오래전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다. 성경에는 모세가 동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에 이 지역에 내려진 10가지 재앙 중의 하나로 황충의 습격이 등장한 바 있으며, 1784년 남아프리카에서는 3천억 마리의 황충이 3,000km2의 농지를 초토화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무엇 때문에 평범하게 풀숲에 숨어 있던 초록색 풀무치들이 일순간에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약탈자로 변모하는 것일까?

황충으로 인한 피해의 역사가 길고 광범위하듯이 이들의 행동 패턴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졌다. 그 중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대학 연구팀은 황충의 변신을 유도하는 트리거 포인트(Trigger point, 연쇄 반응을 유인하는 촉매제)는 바로 ‘밀도’라는 것을 알아낸 바 있다.

이들은 일정한 실험 구역 내에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들을 풀어 넣고, 이들이 밀도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연구했다. 개체수가 적고 밀도가 낮을 때는 이들은 각자 행동하며 통일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점점 개체수가 늘어나 이들의 밀도가 1m2당 20마리가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식욕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은 1m2당 20마리의 개체 밀도가 이들의 ‘임계(臨界) 전환점’이며, 이는 곧 메뚜기과 곤충들에게 황충으로 변신하라는 일종의 명령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임계 포인트를 넘어가면 이들의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에, 온순했던 이들이 황충으로 변모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이 내놓았다. 이들은 메뚜기과에 속하는 사막메뚜기를 연구한 끝에, 이들이 사는 곳이 유난히 건조해지면 먹잇감이 부족해진 메뚜기들은 아직 먹을 만 한 풀이 남아 있는 장소로 이동하다가 한 곳으로 모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거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접촉이 이루어지면, 이것이 자극제가 되어 체내 세로토닌의 분비량이 평소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로토닌(serotonin)은 인간의 뇌에서도 분비되는 신경 전달 물질이다. 인간의 경우에도 세로토닌은 극단적인 흥분과 부정적 감정을 조절해 평상심을 유지하고 상쾌한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물질이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며 공황장애나 불안 장애, 섭식 장애와 같은 심리학적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연구팀은 사막메뚜기의 숫자가 임계 전환점을 넘어가도 세로토닌 분비를 억제시키는 약물을 이용하면 이들이 비교적 온순한 단독형 메뚜기로 남아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개체수가 임계 전환점 이하일지라도 세로토닌을 외부에서 주입하면 집단을 이루며 황충의 특성을 보이도록 변모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즉, 메뚜기과 곤충들의 집단행동과 황충으로의 변모 뒤에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황충의 형성 매커니즘을 밝혀, 이에 대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지난 2014년 8월 말, 해남 지방에서 발생했던 풀무치떼는 다행히도 친환경 방제제를 이용해 일단 더 큰 피해는 막았다. 하지만 작년의 갈색 여치 출몰에 이어 풀무치까지, 최근 몇 년 새 황충의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 큰 재앙의 전조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개체 수 증가의 원인으로는 마른장마로 인해 알의 유실이 감소돼 부화율이 높아진 것과 친환경 농법의 확산으로 곤충의 생존 조건이 좋아진 것, 곤충의 천적인 새들의 개체수가 줄어든 것 등이 지목되고 있다.

풀무치의 생존 한계인 10월이 시작됐으니 곧 가을바람과 함께 이들의 개체 수는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원인 파악과 그에 대한 대비책이 불명확하다면 앞으로 이들이 또다시 출현할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풀무치에 대한 생활사나 습성에 대한 연구로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평범한 풀무치의 날갯짓이 대재앙의 전조로 이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동시에 황금빛 들녘의 풍성함을 지켜 농부들의 얼굴에 근심이 서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 이은희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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