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갑
[ 宋萬甲 ]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이른바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송만갑의 출생지에 관해 언급되고 있는 지역은 전남 구례군, 전남 순천시, 전북 남원시, 경남 진주시 등이다. 그동안 『조선창극사』와 제적부, 각종 신문·잡지의 기사 등에 언급된 구례 출생설이 통설로 수용되어 왔다. 최근 제기된 순천 낙안 출생설은 『삼천리』 창간호에 실린 송만갑의 〈자서전〉과 후손의 증언, 송만갑 가족 소유의 토지대장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종손이자, 판소리 명창 송광록(宋光祿)의 손자, 판소리 명창 송우룡(宋雨龍)의 아들, 판소리 명창 송기덕(宋基德)의 아버지이다. 송만갑의 제적등본 윗면에 표시된 '무(巫)'라는 기록은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으로 이어지는 송씨 가계가 무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송만갑 이정규 발행. 『한국 국보급 국창 명창 명고 명금 사진시집(韓國 國寶級 國唱 名唱 名鼓 名琴 寫眞詩集)』. 순천사진인쇄공사
7세(1871)부터 송흥록과 송우룡을 통해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소리를 익혔으며, 10세에 송흥록의 수제자인 박만순(朴萬順, 1830?-1898?)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전수받았다. 박봉래(朴奉來, 1900-1933), 김정문(金正文, 1887-1935), 김초향(金楚香, 1900-1983), 김추월(金秋月, 1897-1933),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 배설향(裵雪香, 1895-1938), 신금홍(申錦紅), 장판개(張判盖, 1885-1937), 박중근(朴重根), 박록주(朴綠珠, 1909-1979), 김소희(金素姬, 1917-1995), 박동진(朴東鎭, 1916-2003), 그리고 아들 송기덕 등이 그의 제자이다.
13세에 순천 대사습놀이 등의 무대에 나가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23세부터 전국을 유람하면서 소리를 했다. 37세부터 46세까지 서울에 머물며 원각사에서 창극 공연을 주도했다. 43-44세 무렵에 녹음한 〈농부가〉(Victor Record 13536 Korean Male Song With Drum 롱부가(農夫歌) Nongpu-Ka 한국젼라도(韓國全羅道) 챵부송만갑(唱夫宋萬甲) Recorded in Korea)는 현재 전하는 판소리 음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젊은 시절 전라감사 이재각(李載覺, 1873-?)으로부터 참봉 벼슬, 순종 때 어전에서 소리를 해 감찰 벼슬, 원각사 해산 이후에 궁내부 별순검 벼슬을 받았다. 송만갑협률사를 조직해 지방을 순회하기도 했으나, 대개는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69세에 조선성악연구회의 교육부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썼다.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에 자주 출연했으며, 단가 〈진국명산〉(Victor Junior KJ1001-A 短歌 鎭國名山(진국명산) 宋萬甲), 〈춘향가〉 중 '이별가'(Victor Junior KJ1001-B 春香傳 離別歌(리별가) 宋萬甲)와 '십장가'(Columbia 40145-B 春香傳 十杖歌 宋萬甲 鼓韓成俊), 〈심청가〉 중 '심봉사 자탄하는 대목'(닛뽀노홍 K176A 심봉사공방자탄가 宋萬甲)과 '중타령'(졔비標朝鮮레코-드 B136-B 沈淸傳(즁나려오는데) 宋萬甲 鼓韓成俊), 〈수궁가〉 중 '고고천변'(닛뽀노홍 K179-B 별주부타령 宋萬甲)과 '토끼 수궁에서 나오는 대목'(Columbia 40219-B 水宮歌 톡기타령 宋萬甲), 〈흥보가〉 중 '박타령'(Columbia 40219-A 興甫傳 박타령 宋萬甲), 〈적벽가〉 중 '이놈 저놈 말들어라'(닛뽀노홍 K202-A 조조금무가 宋萬甲 宋基德)와 '새타령'(닛뽀노홍 K188-B 젹벽원조자 宋萬甲) 등 판소리 다섯바탕을 두루 유성기 음반에 남겼다. 1997년부터 전남 구례에서 '송만갑 판소리·고수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조선창극사』 「송만갑」 조에서는 송만갑을 동편제 명창으로 분류했다. 송만갑은 가계의 동편제적 법통을 소리의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정창업(丁昌業, 1847-1889)에게 배운 서편제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서울·경기 지역 특유의 경드름을 활용하는 등의 노력으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소리제를 구축했다. 이에 부친 송우룡이 "송씨 가문 법통을 부살(扶殺)하는 패려자손(悖戾子孫)"이라 하여 집안에서 쫓아냈다는 일화도 있다. 박기홍(朴基洪), 전도성(全道成, 1864-?) 등 일부 명창들도 그가 대대로 지켜온 송문(宋門)의 동편제 소리를 통속화시켰다고 비난했다. 송만갑은 시대적 흐름을 수용해 대중과 교감하는 소리가 진정한 예술이라는 판소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에 굴하지 않았다. "극창가(劇唱家)는 주단 포목상과 같이 비단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라는 그의 말에서 이러한 가치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유성기 음반으로 남긴 소리에는 동편제의 기본적인 바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떠는 음이나 꺾는 음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우조의 정대한 시김새를 구사했으며, 대마디대장단의 틀에 사설을 붙여 나가는 붙임새를 사용했다. 또 힘 있고 무거운 통성 발성을 위주로 하되, 끝음을 길게 빼지 않고 소리꼬리를 짧게 끊어 힘이 뭉쳐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두루 잘 불렀으며,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심청가〉·〈적벽가〉를 장기로 삼았다. 〈춘향가〉 중 '농부가'가 그의 더늠이다. 음반상으로는 〈심청가〉 녹음을 가장 많이 남겼는데, 중년에 상처(喪妻)한 후로 심봉사 생각에 목이 메어 〈심청가〉는 잘 부르지 않고, 웃음이 많은 〈흥보가〉를 주로 불렀다고 한다. 철성(鐵聲)으로 부르는 〈적벽가〉 중 '화용도 대목'도 그의 특장으로 평가되었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의 『벽소시고(碧笑詩稿)』 중 "나라에서 판소리 불린 지 어언 오백 년(樂府東邦五百年), 구례에서 처음으로 한 가선이 배출되었지(鳳城初出一歌仙). 철성으로 문득 '화용도 대목'에 이르면(鐵聲忽到華容道) 만 길의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네(萬丈銀河落九天)"라는 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구례동편소리축제추진위원회 기획·유영대 엮음, 『동편제 명창 송만갑의 예술세계』, 민속원, 2010.
- 김기형, 「송문(宋門) 일가의 판소리사적 의의와 동편제의 맥」, 『돈암어문학』 11, 돈암어문학회, 1999.
- 김기형, 「송만갑 명창의 출생지 고찰 논의와 그 성격」, 『판소리연구』 28, 판소리학회, 2009.
- 이경엽,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세계」, 『판소리명창론』, 박이정,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