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악연구회

조선성악연구회

[ 朝鮮聲樂硏究會 ]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는 1934년에 결성되어 1940년까지 존속했던 판소리·기악 중심의 전문 전통음악 단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934년 5월 창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음악연구회였으나, 같은 해 9월에 조선성악연구회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20세기 이후 전통음악인들은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적인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경성구파배우조합, 1920년대에 조선악연구회, 조선음악연구회, 조선음악협회, 1930년대에 조선음률협회, 조선악정회, 조선성악연구회 등이 설립된 정황으로부터 이러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1930년에 설립된 조선음률협회(회장 : 김창환(金昌煥, 1855-1937))는 판소리 창자 중심의 조직이었으며, 그 조직은 조성성악연구회에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조선음률협회는 "조선가곡의 수정과 보유, 동서 음악의 대비 연구, 가풍(歌風) 개선과 정화, 잡지 발간" 등 공연 외적인 활동도 중시했던 데 비해,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 위주의 공연활동과 연구·교육활동에 큰 비중을 두어, 구체적인 설립취지의 측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였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 잡가, 창극, 산조, 병창, 무용 등 한국 전통공연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전문 단체였으나, 판소리 및 기악 위주의 활동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판소리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5-1939)·정정렬(丁貞烈, 1876-1938)·김창룡(金昌龍, 1872-1943)·이동백(李東伯, 1866-1949)·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박록주(朴綠珠, 1909-1979), 기악 명인 김동강(金東剛)·오태석(吳太石, 1895-1953)·김종기(金宗基, 1902-1940?)·강태홍(姜太弘, 1894-1957)·심상건(沈相健, 1889-1965)·김채련(金彩蓮), 고수 한성준(韓成俊), 기획 김용승(金容承)의 14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김창룡, 이동백, 한성준이 차례로 이사장을 역임했던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성악연구부, 기악연주부, 교습부, 흥행부, 외교부 등의 하부 조직을 두고 있었으며, 경과 보고·결산 보고·임원 개편·규약 개정·새 사업 기획 등을 목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정기 총회를 개최했다. 공식 회관은 서울 공평동에 있었지만 창립 5개월 만에 관훈동으로 이전했고, 순천의 거부(巨富)였던 판소리 후원자 김종익(金鍾翼)의 지원을 받아 서울 익선동 소재의 한옥으로 회관을 다시 옮기면서부터는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했다.

1938년 조선성악연구회 제5주년 기념 원유회(遠遊會) 단체 사진

1938년 조선성악연구회 제5주년 기념 원유회(遠遊會) 단체 사진 『창본 춘향가』. 국악예술학교 출판부. 1967

한편 1936년 5월에는 이윤용(李允用), 이진호(李軫鎬), 김명준(金明俊), 고희준(高羲駿), 이병렬(李炳烈), 오태환(吳台煥) 등 수십 명이 조선성악연구회 후원회를 발족해 조선성악연구회가 안정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실제로 후원회 발족 이전에 이루어진 조선성악연구회의 공식 활동은 명창대회식 공연을 개최하고, 몇 작품의 창극을 무대화하는 등 다소 소극적인 형태였다. 그러나 후원회의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면서부터 조선성악연구회의 운영 및 활동에 대한 거의 모든 소식들이 『조선일보』를 통해 기사로 보도되었으며, 창극 양식의 개선과 가극(歌劇)·연쇄창극(連鎖唱劇)과 같은 새로운 극 양식의 시도, 고전소설을 소재로 한 창극 또는 새로운 창작 창극의 모색 등 한층 적극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성악연구회의 결성 및 활동이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인 창극 문화를 주도함으로써 쇠잔해 가던 판소리 창자들의 연행문화를 다시 대중문화의 주류로 편입시키고, 창극사적으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본격적인 창극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직속극단인 창극좌를 조직한 이후부터이다. 1935년에 처음으로 정정렬이 작창과 연출을 맡아 동양극장에서 창극 〈춘향전〉을 공연했고, 이 작품은 당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널리 주목 받았다. 백포장을 둘러친 가설무대에서 분창(分唱)이라는 형식만 겨우 갖추어 공연했던 과거의 지루한 창극에서 탈피해 서양 연극식으로 사실적인 무대를 꾸미고 각종 장치·도구를 활용하는 한편, 본격적인 음악극 형식을 도입한 것이 춘향전의 성공 요인이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흥보전〉 (1936), 〈숙영낭자전〉(1936), 〈별주부전〉(1937), 〈배비장전〉(1937), 〈옹고집전〉(1938)을 잇달아 공연했으며, 〈유충렬전〉(1936), 〈편시춘〉(1937), 〈농촌야화〉(1938)와 같은 새로운 창작 창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판소리를 학습하고, 판소리 및 창극 공연에 참여했던 당시의 신진 창자들이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판소리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도 판소리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 1964년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예능보유자로 인정된 김연수, 박록주, 김소희(金素姬, 1917-1995), 김여란(金如蘭, 1906-1983), 정광수(丁珖秀, 1909-2003), 박초월(朴初月, 1917-1983)은 물론, 그 후에 보유자로 인정된 박동진, 박봉술(朴鳳述, 1922-1989), 한승호(韓承鎬, 1924-2010), 강도근(姜道根, 1918-1996)도 조선성악연구회 출신의 명창들이다. 이들에 의해 구축된 현대 판소리의 특징적인 면모는 오늘날 연행되고 있는 판소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성혜, 「조선성악연구회의 음악사적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성기련, 「1930년대 판소리 음악문화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