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 金昌龍 ]
김창룡(金昌龍, 1872-1943)은 충남 서천군 횡산리(현재 충남 서천군 장항읍 성주동)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이른바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김성옥(金成玉, 1801-1834)의 손자이자, 판소리 명창 김정근(金定根)의 아들이다. 판소리 명창 김창진(金昌鎭, 1875-?)의 형이자, 역시 판소리를 했던 김세준(金世俊)의 아버지, 김차돈(본명은 김선초, 1924-?)의 조부이다.
충청도 지방의 대표적인 중고제 판소리 가계에서 태어나, 7세(1878)부터 아버지 김정근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3세에 일 년간 이날치(李捺致, 1820-1892)에게 학습한 적도 있으나, 거의 가문소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소리 기반을 확립했다. 그러나 중고제의 약화와 함께, 그의 소리는 안타깝게도 후손이나 여타의 제자들에게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다.
김창룡 이정규 발행. 『한국 국보급 국창 명창 명고 명금 사진시집(韓國 國寶級 國唱 名唱 名鼓 名琴 寫眞詩集)』. 순천사진인쇄공사
33세에 상경해 연흥사(延興社)에서 협률사를 조직했으며, 공연 및 라디오 방송 출연도 활발히 했다. 경성구파배우조합·조선음악협회·조선음률협회·조선성악연구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주요한 임무를 맡아 창극 공연을 주도하는 한편,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30대부터 서울 무대에서 활약했으나, 음반 취입은 54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단가 〈추월강산〉 (Polydor 19302-A 短歌 秋月江山 金昌龍 鼓韓成俊)과 〈대장부한〉(Columbia 40233-A·B 短歌 大丈夫恨(上)·(下) 金昌龍), 〈춘향가〉 중 '사벽도 사설'(Regal C114-A·B 春香傳 春香房그림가(上)·(下) 金昌龍 鼓韓成俊)과 '기생점고'(졔비(標朝鮮)레코-드 B114-A 春香傳 기생점고(上) 金昌龍 長鼓韓成俊),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 대목'(닙보노홍 K502-B 郭氏夫人別世時遺言歌곽씨부인죽을때유언하난데(上) 金昌龍 韓成俊)과 '심봉사 탄식가'(일츅죠션소리반 K554-A 沈淸傳 심봉사자탄가 沈淸使自嘆歌 金昌龍 長鼓韓成俊), 〈흥보가〉 중 '놀보 내외, 박씨 보고 좋아하는 대목'(일츅죠션소리반 K637-B 南道판소리 興甫傳 놀보제비가(下) 金昌龍 鼓沈正淳)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중고제 이전의 고제(古制)소리에도 매우 능숙했던 김창룡은 옛 명창들의 고제 더늠을 음반으로 남기기도 했다. 〈춘향가〉 중 고수관(高壽寬, 1764-?) 더늠 '자진사랑가'와 염계달(廉季達) 더늠 '돈타령'(Regal C155-A 名唱制 사랑가·돈타령 金昌龍), 〈흥보가〉 중 권삼득(權三得, 1771-1841) 더늠 '놀보, 제비 몰러 나가는 대목'과 〈수궁가〉 중 박만순(朴萬順, 1830?-1898?) 더늠 '토끼 화상'(Columbia 40249-A 名唱制 졔비가·톡기화상 金昌龍), 〈심청가〉 중 정춘풍(鄭春風) 더늠 '화초타령'(Regal C154-A 名唱制 花草歌 金昌龍)과 송광록(宋光祿) 더늠 '범피중류'(Columbia 40279-A 名唱制 泛彼中流 金昌龍 鼓韓成俊) 녹음 등이 그에 해당한다. 한편 63세에 『콜럼비아 춘향전 전집』, 64세에 『폴리돌 심청전 전집』과 『폴리돌 화용도 전집』 창극 음반 취입에도 참여했다.
『조선창극사』 「김창룡」 조에서는 김창룡을 중고제 명창으로 분류했다. 타고난 성대가 좋아서 며칠 동안 소리를 계속해도 상하지 않았으며, 성음이 우렁차고 꿋꿋했다고 한다. 소리를 길게 뻗어내어 고졸(古拙)한 느낌을 주었으며, 남도 특유의 계면조 선율은 비교적 적게 사용했다. 대신 비성·시성·뒤집는 목 등 다양한 목으로 감정을 적절히 표현했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이 『벽소시고(碧笑詩稿)』에 "한번 소리하매, 맑기가 옥퉁소를 부는 듯하다(一歌淸似玉洞簫)"라고 평한 데서, 김창룡의 소리가 청아하고 맑은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창룡 『정선조선가요집(精選朝鮮歌謠集)』. 1936
〈적벽가〉와 〈심청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적벽가〉 중 '삼고초려'와 〈심청가〉 중 '화초타령'을 특히 잘 불렀다. 이영민의 『벽소시고』 중 "만일에 '계산월' 대목을 부르게 하면(若敎來唱鷄山月), 해하성의 십만 병사도 흩어버리리(散得垓城十萬兵)"라는 시구로부터 단가 〈초한가〉도 그의 장기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시구의 '계산월'은 〈초한가〉 가사 중 "장자방(張子房)은 계명산(鷄鳴山) 추야월(秋夜月)에 옥통소(玉洞簫) 슬피 불어 팔천 제자(八千弟子) 흩을 적에"에서 "계명산(鷄鳴山) 추야월(秋夜月)"을 줄인 말이다. 김창룡이 〈초한가〉 중 장자방의 옥퉁소 소리에 항우 군사들이 사기를 잃는 대목을 부르면, 십만 병사라도 절로 흩어질 만큼 구슬펐다는 의미이다.
참고문헌
- 신은주, 「20세기 중고제 명창 김창룡」, 『판소리명창론』, 박이정, 2010.
-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