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오명창
[ 近代五名唱 ]
근대 오명창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활약했던 다섯 명의 판소리 명창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전기 팔명창이나 후기 팔명창에서 8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근대 오명창의 5라는 숫자도 당시 명창의 수를 다섯 명만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5는 관습적이고 상징적인 수로, 그 당시 활동했던 명창들 중에서 특히 뛰어났던 사람들을 총괄하는 뜻을 담고 있다. 박기홍(朴基洪), 김창환(金昌煥, 1855-1937), 김채만(金采萬, 1865-1911),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이동백(李東伯, 1866-1949), 유공렬(柳公烈, 1859-?), 전도성(全道成, 1864-?), 김창룡(金昌龍, 1872-1943), 유성준(劉成俊, 1873-1944),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이선유(李善有, 1873-1949) 등이 근대 오명창에 포함되는데, 이 중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등이 주로 꼽힌다.
근대 오명창이 활약했던 19세기 말-20세기 전반은 정치사회상은 물론 판소리사적으로도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판소리의 연행 공간이 재래의 놀이판에서 서양식 실내극장이나 포장식 이동극장 등으로 옮겨졌으며, 판소리 창자들이 배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소리를 하는 창극이 생겨났다. 유성기 음반 녹음 기술과 라디오 방송 기술이 도입되면서 대중들이 음반과 라디오를 통해 판소리를 손쉽게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판소리 법제 간의 교류도 더 용이해졌다.
근대 오명창은 협률사, 원각사를 비롯해 광무대, 연흥사, 단성사, 동양극장, 부민관 등 실내극장에서 판소리나 창극을 공연했으며, 김창환과 송만갑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김창환협률사', '송만갑협률사' 등을 꾸려 포장식 이동극장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김창환은 초대 협률사 및 원각사 주석을 맡아 새로운 판소리·창극 공연을 도모했다. 이후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성악연구회는 입체창(立體唱) 정도에 불과했던 초기 창극이 나름의 연극적 양식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근대 오명창은 더늠의 개발을 통해 판소리의 예술성을 한층 심화시키기도 했다. 김창환의 '제비노정기', 박기홍의 '삼고초려'·'장판교 대전'·'사향가', 송만갑의 '농부가'와 '화용도', 이동백의 '새타령', 김창룡의 '화초타령'과 '삼고초려', 유성준의 '토끼와 자라 문답하는 대목', 정정렬의 '신연맞이' 등이 그들의 더늠으로 전한다. 근대 오명창들이 녹음했던 판소리 음원의 일부는 다시 복각되어 판소리 연구자 및 애호가들에 의해 널리 조사·향유되고 있다.
한편 전기 팔명창 중 모흥갑(牟興甲)과 염계달(廉季達), 후기 팔명창 중 박유전(朴裕全, 1835-1906)과 박만순(朴萬順, 1830?-1898?)에 이어 근대 오명창 중에서도 여러 명의 어전 명창이 탄생했다. 고종은 김창환에게 의관(議官), 송만갑에게 감찰, 이동백에게 통정대부, 박기홍·정정렬·전도성·유성준·김창룡에게 참봉, 정창업(丁昌業, 1847-1889)에게 통정대부의 직계를 내렸다.
참고문헌
- 김석배·서종문·장석규, 「판소리 더늠의 역사적 이해」, 『경북대학교 국어교육연구』 28, 경북대학교 국어교육연구회, 1996.
-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