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준

유성준

[ 劉成俊 ]

유성준(劉成俊, 1873-1944)은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이른바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유성준의 출생지에 관해 언급되고 있는 지역은 전남 구례군과 전북 남원시이다. 그의 부친이 살았던 구례군 광의면 연파리 363번지와 유성준이 살았던 연파리 254번지의 '연파리'가 1906년 이전만 하더라도 '전라도 남원부 소의면 연파정리'였던 데서 혼동이 있어온 것이다. 또 판소리 고수였던 매부 김준만, 판소리 명창이었던 김준만의 형 김관옥이 거주했던 남원군 수지면 남창리에 유성준이 머문 일이 많았기에, 유성준이 남원에서 태어나 구례로 이주한 것처럼 인식된 측면도 있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상쇠 유경학의 아들이자, 판소리 명창 김정문(金正文, 1887-1935)의 외숙, 판소리 명창 김영운(金永雲, 1917-1972)의 외조부, 판소리 명창 장자백(張子伯, ?-1907)의 처조카 혹은 외조카이다.

유성준의 영정사진

유성준의 영정사진

유성준은 어린 시절 처삼촌 혹은 외삼촌 되는 순창의 장자백에게 소리를 배운 뒤, 구례의 송우룡(宋雨龍) 문하에서 학습해 일가를 이루었다. 이후 정춘풍(鄭春風)과 김세종(金世宗)의 지침을 받아 판소리 이론에도 매우 밝았다. 당대 판소리 이론과 실기에 뛰어났던 전도성(全道成, 1864-?)과 쌍벽을 이루는 이론가로, 두 사람은 서로 교유가 깊었으며 논쟁도 자주 펼쳤다고 한다. 김정문, 임방울(林芳蔚, 1904-1961), 김연수(金演洙, 1907-1974), 정광수(丁珖秀, 1909-2003), 박록주(朴綠珠, 1909-1979), 신숙(申淑, 1911-1970?), 박동진(朴東鎭, 1916-2003), 강도근(姜道根, 1918-1996), 박귀희(朴貴姬, 1921-1993) 등이 그의 제자이다.

유성준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의 문희연이나 전주의 대사습과 같은 무대에서 소리를 했다. 30대부터는 협률사, 원각사 등에서 공연했고, 고종으로부터 참봉직을 제수받은 것도 이 시기의 일로 보인다. 그는 시대적 요구를 따라 새로운 소리를 하기보다 전래의 소리를 지키는 일을 과업으로 삼았던 명창 중 한 명이다. 따라서 다른 명창들처럼 협률사를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기보다는 순천, 진주, 하동 등지의 지방에 묻혀 소리를 가르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이때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동진, 강도근, 박귀희 등 많은 제자들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전수했다.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이 상당히 엄격해, 만일 소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다른 견해를 제기하면, 목침을 집어 던지거나 소리 교습을 중단했다고 한다.

유성준은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대목'(Okeh K. 1621-A 三國誌 趙子龍활 쏘는데(上) 劉成俊)과 '자룡, 활 쏘는 대목'(Okeh K.1621-B 三國誌 趙子龍활 쏘는데(下) 劉成俊)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수궁가〉와 〈적벽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수궁가〉는 당대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특히 〈수궁가〉 중 '토끼와 자라 만나는 대목'과 '토끼 신세 그리는 대목'을 잘 불렀다. 유성준 바디 〈수궁가〉는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강도근, 박동진 등 쟁쟁한 명창들을 통해 이어져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유성준 바디 〈적벽가〉는 '삼고초려'가 없는 이른바 〈민적벽가〉로, 동편제 고유의 내력 있는 소리이다.

참고문헌

  • 김기형, 「송문(宋門) 일가의 판소리사적 의의와 동편제의 맥」, 『돈암어문학』 11, 돈암어문학회, 1999.
  • 손태도·김용근, 「동편제 소리의 부활을 꿈꾸며, 판소리 명창 유성준론」, 『판소리명창론』, 박이정, 2010.
  •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