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귀희
[ 朴貴姬 ]
박귀희(朴貴姬, 1921-1993)는 경북 칠곡군 가산면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 명창이자 가야금병창 명인으로, 본명은 오계화(吳桂花)이다.
어린 시절에 오포동 국악전수소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11세(1931)에 달성권번에서 박지홍(朴枝洪, 1889-1961)에게 단가 〈소상팔경〉과 〈만고강산〉을 배웠다. 14세에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입단하면서 박지홍, 장판개(張判盖, 1885-1937)에게 소리를 익히는 한편, 이화중선에게도 〈춘향가〉, 〈흥보가〉의 토막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이후 박지홍에게 〈춘향가〉와 〈화초사거리〉 등을 학습하고, 16세에 조학진(曺學珍, 1877-1951)을 찾아가 〈적벽가〉를 공부했다. 15세에 강태홍(姜太弘, 1894-1957)에게 가야금과 가야금병창, 김남순에게 승무와 살풀이춤을 배웠다. 18세에 박석기(朴錫基, 1899-1952)의 주선으로 담양군 남면의 지실초당에서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을 스승으로 모시고 〈흥보가〉와 〈심청가〉를 학습했다. 19세에 쌍계사로 들어가 유성준(劉成俊, 1873-1944)에게 〈수궁가〉를 익혔다. 21세부터 오태석(吳太石, 1895-1953)을 사사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야금병창에 매진한 이후에도, 이기권(李起權)에게 〈춘향가〉, 박록주(朴綠珠, 1909-1979)에게 〈흥보가〉를 배우는 등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안숙선(安淑善, 1949- ), 강정숙 등이 그의 제자이다.
박귀희 이정규 발행. 『한국 국보급 국창 명창 명고 명금 사진시집(韓國 國寶級 國唱 名唱 名鼓 名琴 寫眞詩集)』. 순천사진인쇄공사
14세에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 17세에 한양창극단에 입단해 공연했다. 22세부터는 동일창극단에서 활동했으며, 이듬해 자신이 창극단 단장을 맡아 단체를 재창단했다. 그는 이때 〈일목장군〉에서 여창남역(女唱男役)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25세에 대한국악원 설립에 참여했으며, 대한국악원의 직속창극단체인 국극사에서 〈선화공주〉, 〈만리장성〉 등을 공연했다. 〈추풍감별곡〉, 〈호동왕자〉, 〈흥보가〉의 남자 배역을 잘 소화해냈던 그는 이후 여성국악동호회의 결성에 참여하는 등 초창기 여성국극의 정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36세부터는 국내 공연 활동 외에 학교 설립과 국악 운동, 후학 양성, 해외 공연 등에도 힘을 기울였다. 40세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여기서 국악교육은 물론 민요의 수집, 작곡, 악보화에 힘썼다. 42세에 국립국극단에서 도창과 작창을 맡았고, 59세-61세에 제3대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운당여관의 자택과 종로에 있는 학원에서도 가야금병창을 전수했다. 59세에 공식적인 최초의 가야금병창 악보집 『가야금병창 곡집』을 발표했으며, 69세에 국악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인간문화재 제23호(가야금병창) 박귀희〉 표지 지구레코드. 1990
박귀희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은 『벽소시고(碧笑詩稿)』에서 박귀희가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에 대해 "고운 바탕 아름다운 얼굴 비단 소매는 길기만 한데(玉質仙容錦袖長), 온갖 꽃도 그대 모습에 미치지 못한다네(百花不及一花娘). 맑은 노래 멋진 춤사위 혼과 함께 어우러지는 곳에(淸歌艶舞和神處), 목석같은 이라도 애간장 끊어지지 않겠는가(鐵石何人不斷腸)"라고 평한 바 있다. 박귀희는 가야금병창이 판소리와는 다른 음악적 특징을 보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체계화했고, 현재의 12현 가야금병창 형태가 하나의 음악양식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 박귀희, 『가야금병창곡집』, 세광음악출판사, 1979.
- 박귀희,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 새소리, 1994.
- 양효숙, 「박귀희의 삶과 예술」,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