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석
[ 吳太石 ]
오태석(吳太石, 1895-1953)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가야금병창의 명인이다. 그의 태생지로 거론되는 곳은 전남 보성군과 전남 순천군 낙안면(현재 전남 순천시 낙안면)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의 명인이자 판소리 명고였던 오수관(吳壽寬, 1875-?)의 아들이며, 판소리 고수 오성삼(吳聖三, 1866-1936)의 사촌형이다.
오태석 이정규 발행. 『한국 국보급 국창 명창 명고 명금 사진시집(韓國 國寶級 國唱 名唱 名鼓 名琴 寫眞詩集)』. 순천사진인쇄공사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오수관의 가야금병창을 들으며 자랐다. 순천의 박덕기(朴德基)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20세(1914) 이후에는 송만갑(宋萬甲, 1865-1939)에게 판소리를 학습했다. 박귀희(朴貴姬, 1921-1993), 장월중선(張月中仙, 1925-1998), 정달영(鄭達榮, 1922-1997)이 그의 제자이다.
오태석은 29세에 상경해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악연구회 등의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40세에 송만갑, 이동백(李東伯, 1866-1949), 정정렬(丁貞烈, 1876-1938)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기악부를 맡았다. 당시 창극 공연에서 〈흥부전〉의 놀부 역, 〈토끼타령〉의 잔나비 역, 〈옥루몽〉의 무부(武夫) 역 등을 맡기도 했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산하의 국극사(國劇社)에 참가해 창극을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유성기 음반으로 가야금병창과 남도잡가를 주로 녹음했는데, 단가 〈초로인생〉(Columbia 40230-A 伽倻琴並唱 草露人生 吳太石)과 〈죽장망혜〉(Victor KJ1296-B 短歌 竹杖芒鞋 伽倻琴並唱吳太石), 〈춘향가〉 중 '박석티'(Kirin C183-A 春香傳 박石틔(上) 吳太石 伽倻琴伴奏), 〈심청가〉 중 '방아타령'(Columbia 40394-A 沈淸傳 방아타령(上)·(下) 吳太石), 〈수궁가〉 중 '토끼화상'(Taihei 8008-A 伽倻琴倂唱 토끼화상 吳太石 長鼓李翠香), 〈흥보가〉 중 '돈타령'(Regal C147-A 伽倻琴竝唱 돈타령 吳太石 長鼓李興元) 등이 전한다.
오태석 『정선조선가요집(精選朝鮮歌謠集)』. 1936
고음에서의 풍부한 성량, 익살과 재담을 섞은 사실적인 너름새로 명성이 높았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은 『벽소시고(碧笑詩稿)』에서 "오동 판과 금빛 줄은 교묘하고 정치한데(桐板金絲巧且精), 다섯 음계 스르렁대는 소리 월변(月邊)에서 일어나는 듯(五音切切月邊生). 아황 여영의 슬픔 어린 〈소상곡〉을 연주할 제(彈至皇英湘水曲), 어룡은 춤추고 봉새, 난새는 울어대네(魚龍起舞鳳鸞鳴)"라는 글로 그의 뛰어난 기량을 묘사한 바 있다. 그의 가야금병창은 리듬이 빠르고 목쓰임이 화려하며, 우조의 흐름을 보이다가 계면조로 계속 반복 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 천주미, 「오태석의 생애와 예술세계」,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