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유
[ 李善有 ]
이선유(李善有, 1873-1949)는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근대 오명창에 속한다. 그의 출신지에 대한 견해는 경남 진주설과 경남 하동설로 엇갈린다. 경남 진주설은 『조선창극사』의 기록을 따른 것이며, 경남 하동설은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의 『벽소시고(碧笑詩稿)』 기록과 이선유의 친인척이 구술한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진주검무 명인 이인자(李仁子)의 오빠이자, 대중가요 작곡가 이재호(李在鎬)와 진주검무 명인 이윤례(李潤禮)의 백부이다.
이선유 이정규 발행. 『한국 국보급 국창 명창 명고 명금 사진시집(韓國 國寶級 國唱 名唱 名鼓 名琴 寫眞詩集)』. 순천사진인쇄공사
10세경(1882) 판소리 공부를 시작해, 15세에 구례의 송우룡(宋雨龍) 문하로 들어가 3년간 소리를 배웠다. 30세 무렵 순창의 김세종(金世宗) 문하에서 수학했다. 오비취(吳翡翠, 1910-1986), 신숙(申淑, 1911-1970?), 박봉술(朴鳳述, 1922-1989), 김수악(金壽岳, 1926-2009) 등이 그의 제자이다.
이선유는 36세부터 38세까지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의 협률사에 참여해 순회공연을 다녔다. 진주로 이주한 뒤 67세까지 진주권번에서 소리를 가르쳤다. 그 사이 58세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으며, 61세에 판소리 명창으로서는 최초로 『오가전집(五歌全集)』(1933)이라는 판소리 다섯 마당 창본을 경성 대동인쇄소에서 간행했다. 『오가전집』은 단순한 소설본이 아니라, 김택수(金澤洙, 1895-1976)가 이선유의 판소리 다섯 마당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은 창본에 해당한다. 소리꾼이 부르는 실제 사설을 채록하고 판소리 장단을 기입해 출판한 최초의 창본이라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한편, 이선유는 50대 후반-60대 초반까지 상당한 분량의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다. 〈수궁가〉 중 '임자 없는 녹수청산'(Columbia 40173-A 水宮歌 톡기타령(上) 李善有), '토끼 팔난 대목'(Columbia 40173-B 水宮歌 톡기타령(下) 李善有), 〈춘향가〉 중 '홍로의 불'(Regal C146-B 春香傳 洪爐의불 李善有 鼓韓成俊), '이별가' (Columbia 40340-A 春香傳 離別歌 李善有 鼓韓成俊), 〈심청가〉 중 '소상팔경'(Regal C181-A 沈淸傳 瀟湘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Regal C181-B 沈淸傳 瀟湘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등을 녹음했다.
이선유 『정선조선가요집(精選朝鮮歌謠集)』. 1936
이선유는 가늘고 맑으면서 특이한 울림이 있는 목을 타고난 명창이었다. 또 저음역과 중음역은 통성으로 중후하게 내면서, 고음역은 가성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소리를 부드럽게 이어가다가도 악구의 끝을 어김없이 힘 있게 올려 끊어주거나, 강하게 내려치면서 소리를 맺었다. 차분하기가 맑고 고요한 달빛 같다가도 폭풍이 몰아치는 듯하다는 이영민의 소리평도 이에 부합한다. 이영민은 『벽소시고』에서 이선유를 강남 땅의 '이가선(李歌仙)'으로 칭하며, "달빛 저어 바람처럼 달리는 대목에 이르러선(及當穿月驅風際) 온 세상 명창들도 앞서질 못하누나(並世諸家不敢前)"라는 시구로 그의 성음을 설명했다. 별다른 기교 없이 자연스럽고 절제된 소리를 함으로써 점잖고 담백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의 창법 중 가장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장기는 〈수궁가〉였다.
참고문헌
- 김택수, 『오가전집』, 대동인쇄소, 1933.
-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 출판부, 1940.
- 최난경, 『이선유 오가전집 연구』, 박이정,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