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

이수경

[ 李壽卿 ]

요약 거문고 연주가. 교방사(敎坊司)의 악공(樂工) 및 전악(典樂). 대한제국(1897~1910) 때 궁중음악인.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사장(雅樂師長). 자는 치일(致一). 호는 송사(松史). 전공은 거문고. 본관은 경주(慶州). 고종(1863~1907) 때 전악 이인식(李寅植)의 장손(長孫). 이병성(李炳星)의 아버지. 족적은 경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입정동(笠井洞) 47통 6호. 1882년(고종 19) 12월 19일생. 경성부 남부 명례방(明禮坊) 남산동(南山洞) 출생.
출생 - 사망 1882년 ~ 1955년
이수경

1892년 11세 때 정재무동(呈才舞童)이었던 관계로 궁중정재(宮中呈才)에도 뛰어나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는 춤은 모두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다.

1895년(고종 32) 4월 1일 장례원(掌禮院)의 악공으로 전임됐으며, 1902년(광무 6) 9월 9일 장례원의 전악으로 승격되었다. 1901년(광무 5)에 가전악으로 낙점되었다. 1901년 5월 명헌태후(1831~1904)의 망팔순(71세)을 경축하는 잔치 때, 그리고 같은 해 7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보령(寶齡) 50세를 경축하는 만수성절(萬壽聖節)의 잔치 때 방향차비(方響差備)였다.

1902년 4월 고종황제의 보령이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 입소 경축 잔치 때, 편경차비(編磬差備) 및 집박전악(執拍典樂)이었고, 같은 해 11월 고종황제의 망육순(51세) 및 등극 40년을 경축하는 잔치 때 편종차비(編鍾差備) 및 집박전악(執拍典樂)이었다.

1911년 2월 1일 이왕직(李王職)의 장악(掌樂)이 됐고, 1913년 8월 1일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다. 1913년 아악대(雅樂隊)가 이왕직아악부로 개칭됐을 당시 아악수장인 그는 동료 아악수장인 안덕수·이원근·강희진·함화진·최순영·박덕인·고익삼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5년 당시 안덕수·이원근·함화진 등과 함께 아악수장으로 활동했고, 후에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장(雅樂師長)을 역임하였다. 아악부원양성소의 제3기 아악생(雅樂生)이 입학한 1926년 당시 아악부원양성소의 거문고 사범(師範)이었다.

1930~1936년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 시절 그가 지휘한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봉황음"(鳳凰吟)·"서일화지곡"(瑞日和之曲) 등의 조선아악(雅樂)·현금독주(玄琴獨奏)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32년 10월 13일 이습회(肄習會)의 제1회 공연 때 "영산회상"의 "본령산"(本靈山)·"중령산"(中靈山)·"세령산"(細靈山)을 독주한 이후부터 1936년 11월 12일 제49회 공연 때 "수연장지곡"을 합주할 때까지 꾸준히 공연활동에 출연하였다.

1939년 이왕직아악부를 사임할 때까지 김영제(金寗濟)·함화진(咸和鎭)·최순영(崔淳永)과 더불어 아악의 보존과 육성에 공헌했다. 현재 종묘대제(宗廟大祭) 때 추는 일무(佾舞)와 악장(樂章)은 대부분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6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