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은 모드가 공이다

제법은 모드가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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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포교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대지도론

석존께서 사밧티국의 기원정사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설법하고 계셨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석존께서는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시었다.
제법(諸法)은.,
(1)환상(幻像) 같고
(2)불길 같고
(3)물속에 있는 달과 같고
(4)허공(虛空) 같고
(5)메아리 같고
(6)켄닷바성(城) 같고
(7)꿈과 같고
(8)그림자 같고
(9)거울에 비친 상(像) 같고
(10)화(化)같다.
이상 열 가지 비유는 제법의 공(空)이라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상 열 가지 비유를 순서에 따라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다.
(1) 제법이 환상 같다는 비유는 제법이 공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에 대하여 갑(甲)과 을(乙)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다. 을은 말한다.
『일체의 제법이 모두 공이라면 무슨 까닭에 제법 중에서 어떤 것은 보아야 하는 것이고, 들어야 하는 것이고, 냄새를 맡아야 하는 것이고, 핥아야 하는 것이고, 만져봐야 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알아야 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 구별이 있는 것이냐? 그리고 한결 같이 공이고 무(無)인 제법이 더구나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소리를 보고, 색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냐?』
을의 비난에 대하여 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법의 상(相)은 공이다. 그러나 다 같이 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에서도 보아야 되는 것과 보지 말아야 되는 것과 구별이 있는 것이다. 저 환상의 코끼리나 말 같은 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지만 그 색을 보고 소리를 들어서 육감(六感)의 상대가 되는 것은 조금도 뒤섞이는 일이 없다. 제법에 있어서도 이와 똑같다. 전에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참고가 되는 한 가지 좋은 예를 들으셨다. 그것은 덕녀(德女)와 부처님의 문답이다.』
갑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이야기에 의하면 덕녀와 부처님과의 문답은 무명(貿明)의 유무에 대한 것이었다.
『세존님, 무명은 안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면 밖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다.』
『그러면 안팎 양쪽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다.』
『그러면 전세에서 온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다.』
『그러면 이 세상을 따라 가는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다.』
『세존님, 무명에는 생멸(生滅)이 있는 것입니까?』
『생멸은 없다.』
『무명에는 어떤 일정한 실성(實性)이 있는 것입니까?』
『실성은 없다.』
『세존님, 그러시다면 무명은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고, 안팎에도 없고, 또 전세에서 현세에 있는 것도 아니고, 현세에서 후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진실의 성(性)도 없다는 말씀이신데 그렇다면 어찌하여 무명의 인연에 의하여 모든 고뇌가 모여 오는 것입니까?
세존님, 무명은 고뇌의 근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가지와 잎과 꽃이나 열매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근본인 무명이 없다면 지엽(枝葉)의 고뇌도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제법의 상(相)은 본래 공이지만 범부는 무지한 까닭에 공이 제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번뇌의 인연이 몸, 입, 마음(意)의 온갖 업(業)을 가져오고 혹은 괴로움을 받고 혹은 즐거움을 느껴서 드디어는 후세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번뇌라든가, 몸, 입, 마음의 업(業)이라든가 고락(苦樂)의 과보라는 것이 있을 리도 없고, 그 고락의 과보를 받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세상에 환술사(幻術師)가 있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 환술로 나타나는 것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밖에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안팎에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전세에서 현세에 이르고 현세에서 후세에 이르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환술이 나타내는 현상에 생멸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환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단 하나라도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환술을 보고나 들은 일이 있는가?』
『네, 듣기도 했고 본 일도 있습니다.』
『환술 자체가 원래 공일진대 어떻게 그것을 견문(見聞)할 수 있단 말인가?』
『세존님, 환술의 상(相)에는 근본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명이라는 것도 환술에 견주어 보아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명은 안에 있지도 않으며, 밖에 있지도 않으며, 안팎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생멸과 실성도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무명의 인연은 사실상 여러 가지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환술이 멈추면 그 현상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명이 사라지면 무명이 원인이 되는 현상도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갑은 이상과 같은 부처님과 덕녀의 대화를 인용하여 제법이 환상 같다는 것을 입증했다.

(2) 제법은 불길 같다는 비유는 불길이라는 것은 원래 바람을 일으키고 먼지를 날려서 그 먼지가 햇빛에 비추이면 광야를 달리는 말 같은 그림자를 나타낸다. 무지한 사람은 이것을 먼 발치에서 보고 물이라고 착각한다. 남자라든가 여자라든가 하는 것도 요컨대 생사의 광야에서 일어난 사념(邪念)의 먼지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망념(妄念)으로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다.

(3) 수중의 달과 같다는 비유는 달은 본래 하늘에 있는 것이지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보고 물속에 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범부는 자기의 그릇된 견식 때문에 하늘에서 빛나는 법성(法性)의 달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하고 어른은 그것을 보고 웃고 있다.
슬기가 없는 무지한 사람은 헛되게 남자나 여자에 집착하여 그것을 잡으려고 하는데 성현(聖賢)은 이렇게 무지한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을 측은히 여기고 웃는 것이다.
『정신없이 재물을 탐내고
죽은 자가「삶」을 바라는 것은
물 속의 달, 불길 속의 물,
허황된 것을 얻으려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망녕된 일이니
성현이 보고 웃음이로다.』

달의 그림자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물이 잔잔한 경우에 한하지, 흔들리고 있는 물에서는 모양이 확실하지 않다. 무명한 마음의 잔잔한 물에는 소아(小我)나 교만의 그림자가 비추이지만, 진실이란 지혜의 지팡이가 이 심수(心水)를 휘저으면 그들 번뇌의 그림자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4) 제법이 허공 같다는 비유는 허공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말만 있는 것이고 그 실(實)은 없는 것이다. 허공은 멀리서 바라보면 파란 유리(溜璃)같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다만 공(空)일 뿐이다. 지혜와 슬기가 없는 자는 제법의 실상(實相)을 모르는 까닭에 너다, 나다, 남자다, 여자다라고 집착을 해서 제법의 공무(空無)를 모르는 것은 마치 하늘을 쳐다보고 파란 물체가 실지로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허공의 본성(本性)은 청정(淸淨)이지만 무지한 자는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부정(不淨) 하다고 생각한다. 제법의 본성도 원래 청정한 것이지만 음욕(淫慾), 노여움, 어리석음 같은 그늘 때문에 부정하다고 단정하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

『여름 하늘에 뇌우가 있고
먹구름의 오고 감이 정처 없도다.
어리석은 범부의 마음 하늘(心空)에,
번뇌의 구름은 가실 줄 모른다.

겨울 하늘에 햇볕이 비쳐도
눈발이 날리고 그늘이 생긴다.
스스로 지은 욕심의 물들음이,
마음을 더럽히는 것과 같도다.

봄 하늘의 흐린 날씨에
햇빛이 구름에 가리우기 쉬운 것같이
욕심의 물들음을 멀리 한 사람도
어리석음, 교만의 그림자는 그래도 남아 있다.

가을 하늘 높게 맑아
창공만리 무한히 푸르다.
번뇌를 끓어버린 아라한은,
하늘의 밝은 달 구름도 없다.』

(5) 제법이 메아리 같다 함은 깊은 산이나 계곡, 큰 집안에서는 소리가 메아리 쳐서 반향이 있는 것이다. 이 메아리는 본래 공(空)이 없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의 귀를 홀리게 한다. 산울림은 흔히 무지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있어서 소리를 낸 것이라고 생각케 한다. 제법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6) 제법이 켄닷바성과 같다는 것은 동천에 해가 뜰 때, 하늘 한쪽에 성문, 누각, 궁전 등이 나타나서 사람이 드나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이 보일 때가 가끔 있다. 해가 높이 뜨면 자연히 사라져버리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을 켄닷바성 이라고 부른다. 무지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실지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히 가까이 가려고 하면 그 사이에 없어져 버린다. 화끈거리는 열기의 말 같은 것을 물이라고 생각하여 급히 가까이 가보아도 아무 것도 얻지를 못한다.
지쳐서 산골짜기에서 소리를 지르고 산울림을 듣고 살려달라고 생각하고 거민(巨民-그 지방에 오래 살고 있는 백성)을 찾아 헤매어서 더 한층 피로를 느끼는 것도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제법이 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음욕과 노여움을 쫓아 사방으로 광분하여 잠시의 즐거움에 만족하려는 자는 먼저 보다 더한 고뇌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7) 제법이 꿈과 같다는 비유는 원래 꿈은 꿈에 지나지 않는데 무(無)를 실(實)로 생각하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그 허황됨에 자기 자신도 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기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기뻐하고 노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노여워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한다.
꿈에는 원래 다섯 가지 구별이 있다. 비교적 체온이 높을 때에는 불, 또는 황색, 적색에 관한 꿈을 꾼다. 체온이 낮았을 때에는 물, 또는 백색에 관한 꿈을 꾼다. 그리고 풍기(風氣)가 많았을 때에는 대개는 날아다니는 것 혹은 흑색에 관한 꿈을 꾼다. 보고 들은 것을 너무 생각하고 있으면 그 일을 꿈에 본다. 또 제천(諸天)이 사람에게 미래의 일을 알리려고 꿈을 꾸게 하는 일도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종류의 꿈은 어느 것이나 사실로 있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꿈은 누구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꿈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다음의 예로 알아보자.
머리에 뿔이 있는 인간이 비행기 모양으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갑(甲)이라는 사람이 꿈을 꾼 것으로 현실이 아니었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을(乙)과 병(丙)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는가 어떤가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을은 말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머리가 있다. 세상에는 뿔이 있다. 또 허공도 있고 날아다니는 것도 있다. 마음이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들을 한테 묶어서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이 공중을 비행한 꿈을 꾸었다 해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세상에 머리와 뿔이 있는 것이 현실인 이상 한 마디로 웃어 넘긴다는 것은 오히려 웃는 사람의 생각이 얕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병이 말했다.
『그야 자네 말대로 사람의 몸에는 머리가 있고 세상에는 뿔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망견(妄見)에 지나지 않는다.』
을은 지지 않고 대답하였다.
『세상은 넓다. 그리고 전세의 인연도 모두 각각이어서 다 다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는 없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는 머리에 뿔이 있는 사람이 있고 혹은, 손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 다리가 한쪽 밖에 없는 사람이 활개를 치고 살고 있지 않다고 아무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키가 한 자 밖에 안 되는 사람과 혹은 아홉 자 나 되는 거인(巨人)이 다른 나라에는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머리에 뿔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그렇게 문제삼을 것이 못 된다.』
병은 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하기야 넓은 다른 곳에 가면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만이 살고 있는 곳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꿈에 본 이 나라 사람에게 뿔이 사실 있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망견이다. 실제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제로는 없는 것이 꿈에서는 있는 것이 되는 경우와 반대로 꿈에서는 무(無)인 것이 실제로는 유(有)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제법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그림자도 형태도 볼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듣고 이것을 알 수는 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보살은 『제법은 꿈과 같다』라는 것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과 같이, 환상과 같이
켄닷바성과 같이
일체의 제법도
또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제법을 풀이하는 것은 제법의 참다운 뜻과 그 실상(實相)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8) 제법이 그림자 같다고 하는 것은, 물건의 그림자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또 그림자는 빛이 비치면 나타나지만 빛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그림자는 사람이 가면 따라가고, 사람이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이고, 사람이 멈추면 따라서 멈춘다. 선악(善惡)의 업(業)의 그림자도 이와 같아서 사람이 저승으로 갈 때에는 따라서 사라지고, 이 세상에 있으면 따라서 붙어 있으며, 그 과보(果報)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에는 죄복(罪福)의 인연이 성숙할 때 언제든지 표면으로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도 쫓아가고
깊은 산속으로 가도 쫓아가고
땅속 밑바닥까지도
쫓아서 따라온다.

바윗돌 속까지도
깊은 바다 밑까지도
설혹 어떠한 곳까지라도
업(業)의 그림자는 떨어질 때가 없다.』

그러므로 『제법은 그림자 같다』고 하는 것이다.

(9) 제법은 거울에 비치는 상(像)같다는 비유는, 거울 속에 비치는 상은 거울 면의 작용도 아니고, 거울 앞에 있는 사람의 작용도 아니고, 자연히 비치는 것도 아니다. 거울 앞에 있는 자의 인(因)과 거울의 연(緣)이 화합하였을 때 비로소 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인연의 소치인 것이다. 모든 제법도 또한 반드시 인연의 화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인연 없이 제법은 이룰 수 없다.
무지한 자는 이 도리에 어두워서 인연 화합의 현상을 실제로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다. 나무에서 불을 얻고, 땅에서 물을 얻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모두가 인연의 소치인 것이다.
그리고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은 또한 공무(空無)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거울 속의 상을 보고 애착심을 일으켜, 거울을 깨뜨리고 찾아보아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함에 실망하고 만다.
제법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인연생(因緣生)의 법(法)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 거울 속의 상과 같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가르치신다.
『인연생의 법이란, 자성이 없어서 공무(空無)한 것이다. 본래 공(空)이 아니라면, 인연이라는 것은 유(有)일 것이다.』
(10) 제법이 화(化)와 같다는 것은 화란 변화심(變化心)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은 여덟 가지의 변화를 일으킨다.
(一) 마음이 작아졌을 때에는 모든 것을 작은 먼지 같이 한다.
(二) 마음이 커졌을 때에는 모든 것이 허공에 꽉 차게 한다.
(三)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에는 모든 것을 새털 같이 한다.
(四) 마음이 자재(自在)일 때에는 능히 큰 것을 작게 하고 긴 것을 짧게 한다.
(五) 마음은 모든 것의 중심 주력(中心主力)의 지위(地位)에 있다.
(六) 마음은 때로는 아무리 먼 곳에라도 날아간다.
(七) 마음은 능히 대지라도 움직인다.
(八) 자기가 소망하는 것은 성취한다.

따라서 마음은 일신(一身)을 다신(多身)으로 하고 다신을 일신으로 하고, 돌과 벽 속으로도 마음대로 드나들고, 불을 바람으로, 바람을 불로, 돌을 금으로, 금을 돌로, 땅을 물로, 물을 땅으로 하며, 또 물 위를 걸어다니고, 하늘을 날으고, 손으로 해와 달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성(變化性)은 이와 같이 한(限)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살고 있는 세계에 따라서 변화도 모양을 달리한다.
욕계(欲界)의 환술(幻術)은 여러 가지를 변화시키고, 신통력(神通力)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천(天), 용(龍), 귀신(鬼神)등은 그 과보(果報)의 힘에 따라서 또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색계(色界)로 가면 선정(禪定)의 힘으로 능히 만물을 변화시킨다.
화인(化人)에게는 우리들과 같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 고(苦), 낙(樂)도 없고 낳는 모양까지도 세상 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제법도 또한 생멸을 초월하여 화(化)와 같이 공무(空無)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 열 가지의 비유로서 제법은 본래가 「공(空)」인 것으로 무자성(無自性)임을 알 수 있다.

<大智度論 第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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