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창건설화

낙산사 창건설화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사찰전설

• 주제 : 사찰전설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강원도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그 후 어느 해에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책은「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했다. 대나무는 다시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전하는 낙산사의 창건연기 설화이지만, 이보다도 약 50년 전에 기록된 설화도 있다.
곧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사기(洛山寺記)」가 그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되어 있는 이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쯤의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 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 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龍)을 뵙고자 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다 속의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대성(大聖)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그 말과 같이 가서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가 나타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낙산사 창건설화와 석익장의「낙산사기」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좌구를 물 위에 띄웠다고 했다.
그런데 굴 앞의 50보 쯤에 바위 하나가 있고, 의상이 그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는 「낙산사기」의 내용과 관련지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정성으로 기도하기 7일 만에 천룡팔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굴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했는데,「낙산사기」에서는 14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관음 진신을 친견할 수 없어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 때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다시 7일을 재계하여 진용을 친견했다고 했는데,「낙산사기」에는 관음대성이 굴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산사기」에 의하면 동해용이 여의주와 함께 옥을 주었고, 이 옥으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금당에 소상(塑像)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기록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관음진신이 일러준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만은 일치한다.
따라서 서역의 보타낙가산에 관음진산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는 것은 의상법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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