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

아차산성

[ 峨嵯山城 ]

지역 서울
4보루 원경

4보루 원경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위치한 삼국시대 산성으로,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8월과 1963년 1월에 아차산 서쪽 지역이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1995년에 광진구가 성동구에서 분구되면서 광진구에 편입되었다.

1973년에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에 광진구에서 아차산성 종합복원계획을 수립하여 기초조사 작업을 할 때에 석축 성벽이 노출되었고, 이 구간에 대한 수습발굴이 1997년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8년에는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산성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세밀한 실측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99년에는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산성의 성벽과 문지 및 성 내부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4보루 남쪽 전경

4보루 남쪽 전경

아차산성은 문헌 기록에 일찍부터 등장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백제 한성시대 책계왕(責稽王) 원년(286)에 축조되었으며, 아단성(阿旦城), 아차성(阿且城), 아차성(峨嵯城), 장한성(長漢城)이라고도 불렸다. 『광개토왕릉비』의 영락(永樂) 6년(396)조에는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점령한 58성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도 ‘아단성’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조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아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는 내용도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71에도 “장한성은 신라의 경계인 한산의 북쪽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에 중진을 두었으며 뒤에 고구려가 있었고, 신라인이 거병하여 이곳을 다시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시대에 임금의 사냥터와 목장터(살곶이 목장)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북쪽에서 오는 봉수대로 쓰였다고도 하였으나, 산성으로 쓰인 기록은 없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북쪽에서 내려온 아차산 줄기의 가장 남쪽 부분인데, 남쪽으로 한강변에 닿아 있다. 유적의 평면은 부정 6각형이며, 전체 둘레는 1,038m이다. 가장 높은 곳은 장대(將臺)가 있는 서북단으로 해발 203.4m이고, 가장 낮은 곳은 남문지로 해발 122m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31,271평이며 성 내부 면적은 19,304평(63,810㎡)이다. 내부의 가운데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성벽이 이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은 내외협축의 석성인데, 북벽의 경우 기저부의 폭은 약 8m, 정상부 폭은 6.3m이며, 보축 기저부의 폭은 2.3m이다. 가장 잘 남아 있는 외벽 높이는 약 8m이며 내벽 높이는 대략 5m 가량이다. 기저부인 풍화암반층을 정지한 후 그 위에 석성을 축조하였다. 내벽과 외벽 모두 거의 수직으로 정연하게 쌓았는데, 외벽의 기저부 바깥쪽으로는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보축을 하였다. 외벽 보축의 경사도는 70˚ 인데 아래쪽이 좀더 불룩한 편이다. 보축은 이른바 굽도리쌓기를 했는데,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한 단에 7㎝ 정도씩 들여 쌓았으며, 최상부 4-5단은 10㎝ 정도씩 들여쌓아 기울기를 완만하게 하였다. 체성 내부에는 석괴를 무질서하게 채워 넣었으며 흙은 채우지 않았다. 보축 내부는 체성 부분과 달리 화강암 석괴와 막돌 및 흙을 함께 채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부 지역에 성벽 정상부가 남아 있는데, 두께 10㎝ 정도의 얇은 판석을 이용하여 체성의 윗면을 덮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이 무너졌기 때문에 성가퀴(女牆) 등의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성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중앙부에는 대형 초석을 이용한 건물지가 조사되었으며, 규모는 남-북 9m, 동-서 약 24m로 추정된다. 건물지 외곽으로는 석축 기단이 돌려져 있다. 초석 크기는 정연하지 않으나 큰 것은 1.2×0.8m, 작은 것은 0.7×0.6m 가량 된다. 이 건물지는 남-북 6칸이고 동-서로는 최소 12칸이나 되는 대형이며, 산성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서쪽에서 연못(蓮池) 1개가 확인되었다. 일부분만 조사하였으나, 평면은 원형(圓形) 또는 말각방형(抹角方形)이며, 규모는 지름 12m, 깊이 5m 가량 된다. 연지는 암반을 수직으로 판 후 바닥에 50㎝ 두께로 뻘흙을 바르고, 벽체는 치석(治石)된 괴석으로 쌓아 올렸는데, 보축 부분은 7단의 석렬을 성벽처럼 쌓았고, 30㎝ 안으로 들여 다시 7단의 석렬을 쌓는 식으로 만들었다. 한 층의 높이는 1.0-1.3m이며, 모두 4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지는 2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동벽의 해발 158m 지점과 남벽의 해발 122m 지점에 있다. 산성의 가장 남쪽으로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가장 낮은 지역은 남문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최근에 하수관을 설치하고 축대를 쌓으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동문지는 남쪽으로 진행하는 성벽을 폭 4.5m 정도로 자르고 양옆으로 석축을 쌓아 조성하였다. 이 석축과 나란하게 성 내부쪽으로 석렬이 이어지고 있으며, 성 외부쪽으로는 보축 성벽이 둥글게 굽도리를 이루고 있다.

몇 차례 조사를 통하여 많은 양의 기와편과 토기류 및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기와는 대부분이 암키와인데, 문양에는 선조문(線條文)이 가장 많고 격자문(格字文)과 승문(繩文)이 타날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양 및 기와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이들 기와류는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암키와 외에 연화문(蓮花文)이 시문된 수키와 와당(瓦當)이 몇 점 출토되었는데, 1점은 가운데 자방(子房)에 4개의 돌기가 있고 그 주위에 모두 10개의 연판이 시문되어 있다. 이 연화문 와당은 신라 것이다.

그밖에 소량의 명문와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북(北)’, ‘한(漢)’, ‘한산(漢山)’ 등의 명문이 좌서(左書)되어 있다. 파편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전체 명문은 알 수 없으나, 과거 한강 유역에서 채집된 명문와 자료를 참고하면 ‘북한수국해구(北漢受國蟹口)…’와 같은 내용이 타날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는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각병(角甁), 단각고배, 인화문토기 완, 토기 뚜껑, 등잔, 주름병 등이 출토되었는데, 각병의 존재로 보아 8-9세기경까지도 이곳에 건물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북벽 내부 건물지에서 사람 모양의 토우 1점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화살촉을 비롯한 무기와 철제초두(鐵製鐎斗), 보습, 쇠스랑 등 다양한 철기가 출토되었다.

이상과 같이 아차산성은 백제 초기에 초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몇 차례 조사 결과 초기백제의 유구유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성벽과 건물지, 연지 등 대부분의 시설물은 통일신라기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 지점에 국한된 시굴조사였음을 감안할 때 전면적인 정밀조사가 이루어지면 성격이 더욱 명확히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아차산성-시굴조사보고서-(임효재·최종택·윤상덕·장은정, 2000년)
  • 峨嵯山城試掘調査略報告(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9년)
  • 96보수구간내 아차산성 실측 및 수습발굴조사보고서(명지대학교부설한국건축문화연구소, 1998년)
  • 아차산성 기초 학술조사보고서(명지대학교부설한국건축문화연구소, 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