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리 유적

석탄리 유적

[ 松林 石灘里 遺蹟 ]

지역 송림
별도끼. 지름 29cm

별도끼. 지름 29cm

달도끼. 지름 14.2cm

달도끼. 지름 14.2cm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 시우지골에 있는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1964~73년 사이에 4차례에 걸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은 송림시에서 흑교리(黑橋里)로 가는 큰길가를 따라 6㎞쯤 되는 곳에 있다. 송림시 북쪽 월봉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은 마지막 봉우리 아래에 펼쳐진 구릉 평야에 있는 석탄리 마을 동남쪽 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석탄리와 그 언저리의 송림 당산리(唐山里), 황주 청운리(靑雲里)·석정리(石井里)에도 석탄리 유적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전체 범위는 10만㎡에 걸쳐 있고 그 안에서 발굴을 통해 100여 기의 집자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자리(住居址) 32기를 발굴하고 9기를 정리하였으며, 돌널무덤(石棺墓) 2기를 발굴하였다. 그밖에 고대의 무덤과 신석기시대 집자리도 1기가 나왔다. 유적의 층위는 단순하여 표토층 바로 아래부터 문화층이 나타나며 문화층의 두께는 꽤 두터운 편이다.

발굴에서 나타난 집자리 32기는 모두 팽이형토기(角形土器)를 만들어 쓰던 시기의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바닥은 불다짐처리를 하였으며 화덕자리(爐址)는 대부분 벽면에 치우쳐 있다. 집의 짜임과 건축방법의 발전과정에 따라 3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유형은 장방형(長方形) 평면에 집의 크기는 14~55㎡, 움 깊이는 0.2~0.4m 안팎의 반움집이다. 집자리는 대체로 3기가 하나의 단위를 이룬 듯 배치되어 당시 사람들이 세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첫째 유형의 집자리는 21기가 나왔다. 집자리에서 나온 유물은 팽이형토기와 함께 도끼·자귀(手斧)·끌 등의 살림도구와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을 비롯한 농기구, 창·화살촉·작살 등 사냥-채집 도구들이 있고 달도끼(環狀石斧), 별도끼(星形石斧)도 나왔다. 장신구로 쓰던 흙구슬(土球)도 보인다.

둘째 유형의 집자리는 9기가 나왔다. 첫째 유형이 기둥이 없고 벽체 골조로 이루어진데 비해, 둘째 유형의 집은 집자리 바닥 중심선을 따라 기둥구멍(柱孔)이 1줄로 있는 것이다. 셋째 유형에는 집자리 바닥에 3줄의 기둥구멍이 있는 것으로 발굴에서 2기가 나왔다. 집자리 구조를 보아 첫째 유형으로부터 셋째 유형으로 가면서 차차 건축기술이 발전해 나갔고, 건축기술의 발전이 시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둘째 유형과 셋째 유형은 집 크기에서도 첫째 유형보다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집자리가 나온 구역안에서 돌널무덤 2기가 드러났다. 돌널의 크기가 작고 널바닥은 들린 바닥으로 되었다. 회색 판돌(板石)을 4매 짜서 맞춘 것으로 부장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발굴 전에도 밭갈이를 하면서 판돌들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돌널무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진다.

유적의 연대는 첫째 유형의 집자리를 B.C. 1000년기 이른 시기로 보며, 둘째 유형과 셋째 유형은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일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 북한의 선사고고학 3-청동기 시대와 문화(장호수, 백산문화, 1992년)
  • 석탄리 원시유적 발굴보고(리기련, 유적발굴보고 12, 1980년)
  • 석탄리 원시유적 발굴 중간보고(박선훈·리원근, 고고민속 65-3, 19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