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사회동요와 무신의 난

고려의 사회동요와 무신의 난

고려 사회는 문종의 문치정책(文治政策)에 따라 최충 등이 12도(徒)를 설치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떨쳤으나,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종 이후 17대 인종 때까지 인주이씨(仁州李氏)인 이자연(李子淵)→이호(李顥)→이자겸(李資謙)이 7대 80년간 왕실과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자, 왕권의 쇠약과 더불어 권력층은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이자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자 인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으며,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 사이의 반목으로 척준경·정지상(鄭知常)·김부식(金富軾)의 순으로 집권자가 바뀌는 등 귀족정치의 모순이 폭발되어 고려는 내란기로 접어들었다.

1135년(인종 13)에는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주장하자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 귀족정치의 내분이 폭발하였다. 인종에 뒤이어 즉위한 의종은 군신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고 정사를 소홀히 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과거부터 불만이 많았던 무신들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을 즉위시켰다(정중부의 난).

그 후 무신간의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11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은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하였고, 경대승이 병사하자 1183년 천민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이 집권, 또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정권은 우(瑀)·항(沆)·의(竩) 4대 60여 년간(1196∼1258) 계속되었다. 이 결과 전시과의 붕괴로 농장이 확대되었고, 노비 증가·사병 양성·하극상(下克上) 풍조의 대두로 천민 및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질서가 붕괴되었다.

고려의 사회동요와 무신의 난 본문 이미지 1
무신의 난이자겸의 난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무신집권 기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1173년 문신과 결탁하여 의종 복위운동을 한 김보당(金甫當)의 난,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승려들의 반란, 하층민의 반란으로는 1176년 공주(公州) 명학소(明鶴所)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 1182년 전주(全州)의 관노(官奴)인 죽동(竹同)의 난, 그리고 1193년 신라 부흥을 외쳤던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효심(孝心)의 난, 1217년(고종 4) 서경에서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했던 최광수(崔光秀)의 난, 1237년 전라도 담양에서 백제 부흥을 표방했던 이연년(李延年)의 난, 그리고 11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인 만적(萬積)이 노비신분 해방운동을 전개한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231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江華)로 천도하였으나 1259년 원(元)나라와 화의하여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 때까지 80여 년간은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