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이자겸

[ 李資謙 ]

요약 고려시대의 문신. 예종 사후 연소한 태자(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를 설치하여 요속을 두게 되었다. 딸들을 왕비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했다.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척준경 등의 거사로, 유배된 후 죽었다.
출생-사망 ? ~ 1126
본관 인주
별칭 소성군 개국백

본관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 고려말 인주 이씨의 막강한 권세에 힘입어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음서(蔭敍)로 국가 의식을 맡아 처리하는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 누이동생이 순종비인 장경궁주였으나 순종이 죽자 종과 정을 통하다 발각되어 그도 관직이 삭탈되었다. 1108년(예종 3)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사위인 연소한 태자(太子: 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하여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中書令西京留守)가 되고 부(府)를 설치하여 요속(僚屬)을 두게 되었다.

이자겸은 다른 외척이 생길까 두려워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의 비(妃)로 삼게 하였다. 둘째 딸이 아버지 예종과 결혼하였기에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여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였고, 권세에 이어 재물에도 욕심이 많아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1126년(인종 4)에는 군무(軍務)와 국정을 맡아 다스리는 직위인 지국지사(知國知事)의 직위를 만들어 인종이 직접 자신의 집으로 와서 책서를 수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일로 인종은 분개했으며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한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이 거사하였지만 핵심세력을 제거하지 못한채 발각되어 척준경(拓俊京)에 의해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종은  왕위를 이자겸에게 이양하겠다는 조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이자겸은 모든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렸다.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왕비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종이 사소한 말싸움에서 비롯되어 두사람의 사이가 나빠지자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해 달라는 친서를 척준경에게 전달했고 왕의 밀명을 받은 척준경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이 신속하게 거사하여 이자겸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자겸은 전라남도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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