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

유수

[ 留守 ]

요약 고려·조선 시대의 지방관.

고려시대는 서경·동경·남경 등 3경에 3품 이상 관직으로 정원은 각각 1명씩 두었다. 유수사(留守使)·서경유수지사(西京留守知事) 등으로도 불렀다. 987년(성종 6)에 경주대도독부를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고, 995년 동경과 서경에 유수를 두었다. 1012년(현종 3) 동경유수를 경주방어사로 개편하면서 폐지했다가 1030년에 다시 동경유수를 두었다. 1067년(문종 21) 양주(楊州)를 남경유수로 개편하여 서경·동경·남경 등 3경 체제를 마련하고 유수를 두었다.

1204년(신종 7)에 동경유수를 경주지사로 내렸다가 1219년(고종 6)에 복구하였다. 1269년(원종 10) 최탄(崔坦)·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하여 몽골에 항복하자 몽골이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았는데 1290년(충렬왕 16)에 수복하여 서경유수으로 삼았다. 1308년에 서경·동경·남경을 평양부·한양부·계림부로 개편함으로써 유수를 폐지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고려 전기 관제를 복구하여 서경유수를 설치하고 품계를 종2품으로 올리면서 나머지 동경·남경도 함께 복구하고 유수를 두었다가 1362년에 다시 평양부·한양부·계림부로 고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유수는 개성·강화·광주·수원 등에 설치했는데, 품계는 정2품 또는 종2품, 정원은 각각 2명씩 두었다. 1407년(태종 7) 종래의 개성부를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로 고치고, 유후를 두었다가 1438년(세종 20) 다시 개성부로 승격하면서 유수를 두었는데,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품계는 종2품으로 하되 유수 가운데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직하게 하고, 대신에 행정과 군사업무는 전임(專任) 유수가 담당하였다.

이러한 유수제는 조선 후기에 더욱 확대되는데, 1627년(인조 5)에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유수를 두고 품계는 종2품으로 하였다. 1793년(정조 17)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화성에 유수를 두었고, 1795년에 광주에도 유수를 두었는데, 품계는 정2품으로 하였다. 조선의 유수는 개성유수뿐만 아니라 강화·수원·광주유수 모두 정원 2명 중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직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참조항목

광주부, 유수부

역참조항목

개성부, 비장,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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