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

최충

[ 崔沖 ]

요약 고려의 문신.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다.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 《칠대실록》 편찬에 참여했다.1047년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농번기의 공역 금지 등을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을 경계하여 국방을 강화했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문헌공도라 했다.
출생-사망 984 ~ 1068
본관 해주
호연
성재·월포·방회재
시호 문헌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최문헌공유고》

본관 해주(海州). 연(浩然). 호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 문헌(文憲).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등을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국사수찬관(參知政事國史修撰官) 때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41년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나가 영원(寧遠) ·평로(平虜)에 진을 치고, 산성개수(山城改修)를 감독했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 때 농번기(農繁期)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1053년 궤장(几  杖)을 하사받았다.

나이가 많다고 사직을 상주하자 만류 조서가 내려지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상주국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兼 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내렸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후 다시 추충찬도좌리 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다.

처음에는 정종의 묘정(廟庭)에, 후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개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원주)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직산) 등의 글씨가 남아 있고, 저서에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