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변

무신정변

[ 武臣政變 ]

요약 고려 의종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들의 난(亂).

고려 1170년(의종 24) 8월에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와 견룡행수(牽龍行首)·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시에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등을 살해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무신란이다. 표면적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대장군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이나, 젊은 문신 한뢰(韓賴)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무신란의 배경에는 무관을 경시하고 문관을 우대하는 고려의 우문정책이 있었다.

제도적인 면에 있어서 무반은 정3품인 상장군을 최고직으로 하고 있어서 그 이상의 승진이 어려웠고, 최고위직인 재추직은 문반이 독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군대의 최고 통수권조차 문신들에게 있었다. 상원수가 되어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강감찬(姜邯贊)은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문신이었고, 여진족을 물리치고 9성을 쌓은 윤관(尹瓘), 묘청의 난 토벌시 군사령관직을 맡았던 김부식 역시 문신이었다. 이렇듯 무신들은 같은 관직 체계 안에 있었으면서도 제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문신에게 차별을 받았다. 앞의 사건 등은 문신들에게 팽배해 있던 무신들에 대한 멸시나 천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다 의종은 경박한 문신 및 환관들과 유락(遊樂)을 일삼으면서 호화롭고 사치스런 날을 보내기 일쑤였다. 따라서 정치기강이 문란해져 무신들에 대한 천대도 극도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곳곳에서 감지될 정도로 팽배해있었던 듯 하다. 《고려사》 열전 유자량(庾資諒) 전에는 그가 유가의 자제들과 계를 하면서 무인인 오광척(吳光陟)과 문장필(文章弼)을 가입시키려다가 계원에 반대에 부딪치자 무인들의 가입을 거절하면 후회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계원들을 설득시켜 두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무신란 때에는 과연 그들에 힘입어 계원 모두가 무사했다는 기사도 전한다.

그러나 의종은 이러한 분위기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 문신들과 어울렸으며 결국 거사 당일 보현원에 행차함으로써 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정중부 등 주동자들은 사람을 시켜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쳐 선동하며 거의 모든 요직의 문신들을 죽이고 왕마저 폐위하고 왕제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국왕으로 삼았다. 이 사람이 바로 19대 임금인 명종(明宗)이다. 이때가 바로 1170년이고 이로부터 정권은 자연히 무신들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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