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승도의 난

개경승도의 난

[ 開京僧徒─亂 ]

요약 고려시대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성에서 일으킨 일련의 반란.

왕실과 문신귀족들의 보호와 지원 밑에서 융성한 불교는 무신정권이 성립됨에 따라 전과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없음은 물론, 무신집권자들의 횡포가 심해져 승려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그 중에서도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백여 명이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개성북문을 침범하였다.

이의방은 1천여 명의 군사로 수십 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해산시켰다. 이에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등의 승려 2천여 명이 개성 동문에 모였으며, 숭인문(崇仁門)에 불을 지른 뒤 성안으로 들어가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다. 이의방은 부병(府兵)을 징집하여 1백여 명의 승려를 죽이고 성문을 단속하여 승려의 출입을 금하는 한편, 부병을 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용흥사(龍興寺) ·묘지사(妙智寺) ·복흥사(福興寺)에 보내어 절을 불태우고 재화와 기명(器皿)을 빼앗고 돌아오다가 승려들의 요격으로 많은 부병이 죽었다.

결국 귀법사 등의 승려들이 이의방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해 12월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균(筠)의 도움으로 승려 종참(宗旵) 등이 선의문(宣義門:西門)에서 이의방을 죽임으로써 목적은 달성된 셈이었다.

그 후에도 1178년 흥왕사 승려들의 반란, 1216년 몽골에 쫓긴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개성의 흥왕사 ·홍원사(弘圓寺) ·경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와 시흥의 안양사(安養寺), 광주(廣州)의 수리사(修理寺)의 승군들이 17년 최충헌을 죽이려는 반란이 있었다.

이같은 반란은 왕실과 문신귀족 중심의 구지배체제를 복구하려는 운동이었다. 이들 반란의 원인은, 그들이 승군으로 전투에 징발될 뿐만 아니라 갖은 잡역에 동원되어 혹사되었다는 데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민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조항목

무신정권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