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妙淸─ 西京遷都運動 ]

요약 고려 서경(西京:평양)의 승려출신 묘청이 고려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고(천도) 전개한 정치적 움직임과 후에 천도운동이 좌절되자 무력으로 중앙정부에 저항한 이른바 '묘청의 난'을 포괄하여 말한다.
언제 1128∼36년
어디서 서경(西京:평양)
누가 묘청
무엇을 반란
어떻게 무력 저항
서경천도운동의 좌절

시대적 배경

12세기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었는데 당시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여진족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1115) 중국의 송(宋)을 멸망시키고(1126) 나아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가 나타났으며 나라 안으로는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자기의 셋째·넷째딸을 인종에게 바쳐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난을 일으켜(1126) 고려의 정치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가 심화되자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을 이용하여 개경의 세력가를 중심으로한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에 근거지를 둔 일파들에 의해 서경천도설이 표면화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본문 이미지 1
무신의 난이자겸의 난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서경세력과 서경천도의 근거

당시 승려 출신이면서도 풍수지리의 대가이자, 도참사상을 가진 묘청은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으로 예감되는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설을 주장하였다.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신(文臣)인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그는 서경출신으로 당시 인종의 최측근으로 정치적 실세였다. 그외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근신(近臣) 김안(金安)·홍이서(洪彛敍)·이중부(李仲孚) 등과 더불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여, 왕의 측근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시켜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주장한 음양설이 관철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를 실행시키는데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 다시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임원궁(林原宮)을 세웠다. 그리고는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을 주장하며 인종을 부추겼다(1129). 그는 이어 1132년에는 서경에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花宮)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서경천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을 착수하게 되었다.

서경천도의 좌절

그러나 서경에 왕궁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개경파와 서경파 간에 정치적 분쟁이 치열하였고 특히 개경파이자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파의 반발이 거세졌다. 또한 인종이 서경을 행차하는 중에 폭우가 쏟아져 사고가 일어나 시종들이 사망하고 인종이 길을 잃고 헤메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천도를 주장하는 서경파의 농간이 폭로되면서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자 인종의 서경천도 중지명령까지 나오게 됨으로써 서경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본문 이미지 2

묘청의 반란

이렇게 사태가 반전(反轉)하자 묘청은 1135년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및 분사병부상서(分司兵部尙書) 유참(柳旵)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守令) 이하 관리들을 잡아가두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으며,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州郡守)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반란의 진압

이와 같은 묘청 등 서북인들의 반란에 부딪힌 고려조정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하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여 죽이고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는 동안 그 기세에 눌려 도중의 모든 반란군은 항복하였고, 서경 반란군에도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반란군 가운데 조광 등이 묘청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묘청·유참 등의 목을 베어 정부군에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반란이 재연되어 이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결국 1136년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조광 등이 죽음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평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정략적 천도운동의 실패로 결국 반란으로 발전한 끝에 약 1년만에 진압되었으나,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은 자주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의 표출로 묘청의 난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개경의 세력가들에게 반발한 서경세력의 권력투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