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

심의겸

[ 沈義謙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1580년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전직, 정인홍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고,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자 파직되었다.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양군(靑陽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나주의 월정서원에 제향되었다.
출생-사망 1535 ~ 1587
본관 청송(靑松)
방숙(方叔)
손암(巽菴) ·간암(艮菴) ·황재(黃齋)
별칭 청양군(靑陽君)
활동분야 정치

본관 청송(靑松). 방숙(方叔). 손암(巽菴) ·간암(艮菴) ·황재(黃齋). 인순왕후(仁順王后: 明宗妃)의 동생. 이황(李滉)의 문인.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고 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치고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심의겸의 외숙(외삼촌)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으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자신이 세력을 키우고 강직한 신하였던 이준경을 몰아내기위해 골몰하였다. 이를 두고 젊은 사림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이랑은 정계에 진출한 사림(士林)들을 숙청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것을 막고 나선 인물이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량을 탄핵하여 유배시키도록 하였다. 당시 집안의 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고 이일로 심의겸은 곧은 선비로 칭송을 받았다. 1564년 호당(湖堂)을 거쳐 지평(持平)·검상(檢詳)·사인(舍人), 이듬해 사간(司諫)·부응교(副應敎), 1566년 집의(執義)·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내는 동안 척신(戚臣)인 그는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이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신진 사류(士類) 출신인 김효원(金孝元)이 김계휘(金繼輝)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자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의 간신이던 윤원형(尹元衡)의 집에서 기숙한 사실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1574년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발탁되었고 이듬해 의겸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銓郞)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결국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東人)으로 갈라져 당쟁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불렀고,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및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고 불렀다. 심의겸을 지지했던 서인으로는 정철, 윤두수, 박순, 김계휘, 구사맹, 홍성민, 신응시 등이 있었다.

이때 부제학 이이(李珥)는 1575년 그를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김효원을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전직시켜 당쟁을 조정하려 했으나 이미 뿌리박힌 양당은 해소되지 못하였다. 1580년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전직,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고,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자 파직되었다.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양군(靑陽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나주(羅州)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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