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휘

김계휘

[ 金繼輝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동서 분당 때 심의겸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으나, 당파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당쟁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 뒤 평안도 관찰사, 대사헌,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로 베이징에 갔다.
김계휘 신도비

김계휘 신도비

출생-사망 1526 ~ 1582
본관 광산
중회
황강

본관 광산(光山). 자 중회(重晦). 호 황강(黃崗). 3,4세에 문자를 알고 7,8세에 문의(文義)에 통하였으며, 사장(詞章)을 짓는 데 매우 빨라서 다른 사람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555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사관을 거쳐 부수찬(副修撰)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557년 김여부(金汝孚) ·김홍도(金弘度)의 반목으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당하였다.

1562년 다시 이조정랑으로 기용되고, 1566년 직제학(直提學)으로 문과중시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分黨)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었으나, 당파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당쟁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 1578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베이징[北京]에 갔다. 이듬해 돌아와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뒤에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