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량

이량

[ 李樑 ]

요약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왕족이자 척신으로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심의겸 등에 의해 탄핵되었다. 윤원형ㆍ심통원과 함께 명종 때에 외척으로서 전횡을 한 삼흉(三凶)으로 지칭되었다.
출생-사망 1519. 12. 8 ~ 1582. 3. 31
본관 전주(全州)
공거(公擧)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경상도 의령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공거(公擧)이다.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대손으로 부친은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1543)이며, 모친은 정종보(鄭宗輔)의 딸인 동래 정씨이다.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 17일에 이대의 8남 1녀 가운데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대의 고명딸은 심강(沈鋼)에게 출가하여 명종의 정비인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1532~1575)를 낳았다. 따라서 이량(李樑)은 왕족이면서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삼촌이라는 신분도 함께 지녔다.

정사룡(鄭士龍)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2)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에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승정원(承政院),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등에서 헌납(獻納), 수찬(修撰), 교리(校理), 지평(持平) 등의 언관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배경으로 세력이 커진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이량을 중용하였다. 그래서 이량은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명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조정의 정사와 인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59년(명종 14)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된 이량은 이듬해에는 사간원의 대사간(大司諫),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등을 역임했다. 1561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파견되었으나, 이듬해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참판, 예조판서(禮曹判書),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이처럼 이량은 척신(戚臣)으로서 정유길(鄭惟吉)·고맹영(高孟英)·김백균(金百鈞) 등과 당파를 만들어 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량은 1563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는데, 당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던 그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은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전직되었다. 이량은 이정빈의 친구인 유영길(柳永吉)을 후임으로 이조좌랑으로 추천하여 기대승(奇大升)과 허엽(許曄) 등 사림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를 계기로 이량은 허엽과 기대승, 이산해(李山海), 윤근수(尹根壽)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그들과 가까웠던 심강(沈鋼)과 심의겸(沈義謙) 부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리고 이량은 이감(李戡)·신사헌(愼思獻)·권신(權信)·윤백원(尹百源)·이영(李翎) 등과 함께 이른바 ‘육간(六奸)’으로 몰려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명종과 인순왕후는 이량을 유배에서 풀어주려고 했으나 사림 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량은 유배 생활을 계속하다가 1582년(선조 15) 음력 3월 8일에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사망하였다.

이량은 윤원형, 심통원과 함께 명종 때에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렸던 척신으로 그들과 함께 ‘삼흉(三凶)’으로 불리며 사림 세력에게 비판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이정빈도 이량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했으나, 손자인 이충(李沖)과 이명(李溟)은 광해군 때에 서용되어 각기 벼슬이 우찬성과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량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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