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선조

[ 宣祖 ]

요약 조선 제14대 왕(재위 1567∼1608). 처음에는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 쇄신에 노력했고 여러 전적(典籍)을 간행해 유학을 장려했다. 후에 정치인들의 분열로 당파가 나타나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무너져 혼란을 겪었다. 재위 후반에 왜군의 침입(임진왜란 1592~1598)과  건주 야인(여진족)의 침입도 받았다.  
목릉의 선조릉

목릉의 선조릉

출생-사망 1552 ~ 1608
재위기간 1567∼1608
본관 전주
본명 균(鈞), 연(昖)
별칭 소경(昭敬)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전주, 어렸을 때의 이름은 이균(李鈞)이었으나 후에 이연(李昖)으로 바꾸었다. 시호는 소경(昭敬)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의 셋째 아들이니 즉 중종의 손자(셋째 아들 계)이다(중종의 첫째 아들은 12대 인종, 둘째 아들은 13대 명종). 어머니는 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며, 비(妃)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1552년 11월 서울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고, 명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1567(명종 22)년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도 학문에 정진하였다.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하다가 이듬해부터 친정을 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아버지가 대원군으로 봉해짐으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원군제도가 시행되었다.

재위 초기에 조선 전기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갈등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림들을 신원(伸寃)하여 주었고, 반대로 선비들에게 해를 입힌 훈구세력들에게는 벌을 내려 사림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하여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높여주던 일)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南袞)의 관작은 추탈(追奪: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 이름을 깎아 없앰)하였으며,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등을 죽인 윤원형(尹元衡)의 공적을 삭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사림들에게 중앙정계 진출이라는 명분을 확보해 주어 새로운 인물들이 등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재 등용에 과거 성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중용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어 국정을 쇄신하였고, 유학의 장려에 필요한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책들도 편찬하였다.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당파(黨派)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갈등이 기폭제가 되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됨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많은 혼선을 가져왔다.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정권의 우위를 장악한 동인이 서인을 치죄하는 문제를 놓고 강건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여 남인북인으로 갈라지면서 정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때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이탕개(李蕩介)를 중심으로 한 야인(野人)들이 침략하여 경원부가 함락되기도 하였다. 이후 신립(申砬)과 신상절(申尙節)의 반격으로 두만강 유역을 회복하였다. 
조선의 숙원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도 해결하였다. 종계변무는 중국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역대 왕들이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선조 때에 이르러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음으로써 계통을 바르게 하였다.

일본의 움직임이 수상하여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의 서로 다른 동향보고에 의해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선조는 왜군의 한양 입성이 임박해오자 의주까지 피난하였으며, 그 도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원군이 들어와 왜군 격퇴에 일조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항쟁과 적의 해상 보급로를 끊어버린 이순신의 활약, 권율(權慄)의 행주대첩 등은 전세(戰勢)를 바꿔놓아 일본군의 퇴각을 이끌어 내었다. 전쟁 중에도 파당에 의한 갈등으로 인물 등용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군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 : 재정궁핍·기근·군량부족시 곡식을 백성들로부터 헌납받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신분상승, 역의 면제, 죄의 사면 등을 시행한 일)을 강화하여 시행하였다. 1593(선조 26) 임진왜란이 극도에 달하자 호조의 건의로 납속사목(納粟事目)을 정하고, 이에 따라 정부의 부족한 군량이나 군사를 보충하였다. 1594년에는 그 범위를 더욱 확대하였다. 또한 군공사목(軍功事目)을 정하여 군공을 세운 자에게도 논공을 하였다. 한편,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증진시키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조총 사용법, 탄환 제조법 교육에도 힘썼다. 그러나 왜군은 재차 침입하였다(정유재란 1597).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적의 재침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백성들의 진휼에도 힘썼다. 전후 복구사업에도 힘을 기울였으나 실질적인 복구사업은 그의 뒤를 이은 광해군에 의해 추진되었다. 말년에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평상시의 생활이 다른 왕들과는 달리 매우 검소하였으며 학문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의 재능도 뛰어났다. 능호는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 내에 있다.

선조 본문 이미지 1

영성군흥안군정근옹주인성군순화군정혜옹주의창군원종신성군광해군임해군정명공주인목왕후의인왕후덕흥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