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왕후

의인왕후

[ 懿仁王后 ]

요약 조선 제14대 선조의 왕비.
출생-사망 1555 ~ 1600
본관 반남(潘南)
활동분야 정치

성은 박(朴)이고,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존호는 장성(章聖)이며, 시호는 의인(懿仁)이다. 도총관(都摠管) 등을 지낸 반성부원군(藩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1569년(선조 2)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선조(宣祖)와 혼인을 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의 소생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을 친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뒷날 광해군을 양자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평양에서는 먼저 함흥으로 가서 선조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평양의 군민(軍民)들에게 길이 가로막히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선조에 앞서 평양을 떠난 의인왕후는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갔으며, 한양이 수복되어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선조와 떨어져 황해도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선조는 사간원이 잇따라 의인왕후의 환도를 간언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의인왕후는 1595년(선조 28) 겨울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광해군과 함께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도 환도를 하지 못하다가 1599년(선조 32년) 음력 윤4월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600년(선조 33) 병세가 깊어져 그해 음력 6월 27일에 죽었다. 의인왕후는 죽은 뒤에 유릉(裕陵)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의인왕후의 묘역은 1630년(인조 8)에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조성되었던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이 그곳 곁으로 이전되면서 목릉으로 합해져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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