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남인

[ 南人 ]

요약 조선시대 붕당의 하나로 동인(東人)에서 갈라진 정파이다.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세자책봉 문제를 놓고 동인 사이에서 서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자는 쪽과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어 전자가 북인(北人), 후자가 남인이 되었다. 이후 이조 전랑(銓郞)의 천거문제와 개인적인 알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붕당이 고착화되었다.

당시 남인의 주도세력이었던 우성전(禹性傳) 류성룡(柳成龍) 등이 서울의 남산 부근에 살았고, 또한 류성룡이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인이라 불렀고, 북인은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남인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우성전·류성룡·김성일(金誠一) 등이 한 때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1602년 류성룡이 북인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실각한 이후에는 정권이 북인에게 돌아갔다. 북인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광해군 때는 정권을 북인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서인의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여 서인의 주도로 정국이 전환되었다. 이때 남인은 인조를 추대한 서인의 정변을 인정하고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이광정(李光庭) 등을 중심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몇몇 쟁점에서 서인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서인 일반과 손잡고 공신세력의 권력독점과 대청 강화책을 비판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른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꽃피웠던 시기이다. 그러나 남인은 대체로 서인과의 유대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점차 알력이 표면화되는 등 서인세력에 눌려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효종대 이후 기호지역 출신인 허목(許穆) ·허적(許積)과 북인의 후예인 윤휴(尹鑴) 등이 크게 진출하여 남인으로 통합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현종 때 남인과 서인은 예론(禮論)을 사이에 두고 크게 대립하였다. 효종이 죽은 후 조대비의 상복 문제를 놓고 서인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기 때문에 1년 상을, 남인은 효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국왕의 예로서 3년 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립되었다. 또한 효종의 비가 죽었을 때도 같은 논리로 예론이 대립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처음에는 서인의 주장이 옳다고 하였고, 효종의 비가 죽었을 때는 남인의 예론이 옳다고 하여 최종적으로 남인의 논리가 승리하였다.

이러한 예론의 대립으로 인해 현종 말 숙종 초에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 사이에 갈등이 노출되어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탁남은 허적(許積) · 오시수(吳始壽) 등을 중심으로 서인의 제거에 온건한 입장이었고, 청남은 허목(許穆) · 윤휴 · 권대운(權大運) 등을 중심으로한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인의 권력이 비대해진 것을 우려한 숙종이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을 등용하면서 다시 정계에서 멀어지는 듯 했으나, 1689년 장희빈 세력을 이용하여 다시 정국을 장악하였다. 이후 5년 후인 1694년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그를 지지하던 남인세력 역시 서인에 의해 정계에서 멀어져 갔다. 그 뒤로는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 아래에서 오광운(吳光運)·채제공(蔡濟恭) 등을 중심으로 큰 역할을 한 적도 있으나, 서인 ·노론이 주도하는 정치판도를 뒤집지는 못하다가 정조가 죽은 뒤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정계에서 실각한 남인들은 17세기 이후 고향에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유형원(柳馨遠) · 이익(李瀷) · 정약용(丁若鏞) 등과 같은 실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현실비판의식을 통해 조선 후기 새로운 사회질서와 문화의식을 불러 일으키는데 일조하였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광범위한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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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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